동자처럼 세상 살아가는 학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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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처럼 세상 살아가는 학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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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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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통도사 축서암 수안 스님

가끔씩 우리는 말로다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으로 충만할 때가 있다. 아니 혹여 그 기쁨이 조금이라도 넘칠까 두려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이 좀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대가람 통도사가 자리하고 있는 영축산 자락 한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축서암에는 다향(茶香)과 묵향(墨香)과 불향(佛香)이 가득 배어 있었다.

게다가 지는 석양과 함께 내리는 촉촉한 늦 가을비는 사방팔방으로 향하는 사념마저 폭 가라앉게 한다.

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듯 노송으로 둘리워진 축서암. 한쪽 켠에 있는 잡화산방(雜畵山房)에는 선(禪)을 하다가 화로에 차를 다리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또 때로는 전각을하기도 하며 붓을 들어 화선지 위에 글씨를 쓰기도 하는 수안(殊眼) 스님이 계시다.

좋은 곳에서 좋은 스님을 만난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 중에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작년이던가. 인사동에 있는 경인미술관에서 스님을 뵈었다. 스님의 작품 전시회에 갔다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는 스님을 뵙게 된 것이다. 그때 학을 그리는 스님의 자태가 진짜 학같다고 생각했다.

그냥 지나가는 객이 된 나는 스님 주위에선 몇몇 분들과는 몇 발자국 떨어진 발치에서 스님 하시는 말씀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이 붓끝이 어디까지 가는 줄 아나? 우주의 끝까지 가는 기다”하며 부드럽고 날렵한 붓끝이 화선지를 지나 허공 속으로 가고 있었다.

허공 끝까지 간다는 스님의 붓끝은 마치 화두 마냥 계속 나의 가슴속에 남아있었다.

그러면서 언젠가 꼭 한 번은 아주 가까이에서 스님을 뵙고 싶다는 마음 간절하였다. 그러던 차에 좋은 날 좋은 곳에서 스님을 만났다. 그리고 스님의 그림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선화(禪畵)란 무심(無心)이 되어야 하는 게야. 선화는 지식하곤 달라. 우주의 충만한 기운 중에서 일부가 잠시 나라는 이 대롱을 통해서 이 화선지를 스치고 지나갈 뿐이지.”

무(無)자 화두를 들고 참선수행하며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늘 수지독송하고 있는 수안 스님이 그린 그림을 우리는 선화(禪畵)라고 한다. 악필(握筆)로 주먹 쥐듯 붓을 잡고 화선지에 그려내는 스님의 그림은 그대로 우리의 영혼을 맑혀주는 화두가 된다. 때로는 동자상이 되어 나타나고 부처님이 되기도 하고 학이 되고 산이 되어 우리의 영혼에 와 닿는다.

스님의 그림은 보는 이들의 영혼을 투명하게 맑혀주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스님의 원과 기원이 남다른 데서 배어 나오는 것이리라.

스님은 보통 그림을 그리는 사람하고는 다르다. 결코 기교를 부리거나 작품에 가격을 매기지 않는다. 다만 그 그림속에 모든 사람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원을 담는다.

경명주사와 사향, 그리고 금가루, 먹을 사용하는 데에도 최고의 재료를 사용한다. 7,000만 겨레에게 7,000만장의 그림을 갖게 하고 싶다는 스님은 자신의 그림으로 인하여 집안의 기(氣)가 맑아지고 세상이 맑아지길 기원할 따름이다.

1957년에 출가하여 평생을 선 수행과 그림 그리기와 시 쓰는 일로 일관해온 스님을 흔히 세인들은 ‘동자처럼 세상살아가는 학스님’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다가도 기분이 좋으면 덩실덩실 학춤을 추는 스님은 자신 스스로가 그렇게 말하듯 그림을 그릴 때나 시를 쓰거나 각(刻)을 하고 글씨를 쓸 때 항상 즐겁게 한다.

“나의 즐거움이 필(筆)을 통해 화선지 위에 옮겨지면서 나와 그림과 우리 모두가 즐거움으로 가득차기 때문이지. 왜냐하면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가 곧 나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야. 선(禪)의 무한한 정신세계가 다함이 없으니 나의 그림의 세계 또한 끝이 없을 거야. 하루 24시간이라는 한 관념을 떠나서 끝이 없는 선의 정신세계로의 화업(畵業)으로서 정진할 뿐이지.”

모든 것의 뿌리가 되면 반석이 되는 것은 역시 정진이 그 근본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수안 스님은 법열을 오래 끌 수 있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하신다.

선 수행을 하던 스님이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만나면 헤어져야하는 이별의 안타까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이별이 있을 때마다 스님은 무엇인가를 주고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림을 ‘이별을 넘어서는 오작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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