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문학] 현대구미 문학에 있어서의 선사상
상태바
[불교와 문학] 현대구미 문학에 있어서의 선사상
  • 김현장
  • 승인 2007.10.2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트시인(詩人)들은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으로 인하여 장시(長詩)를 쓰는데도 단숨에 써내는 예가 있다. 「마이클 머클루어」는 한번 시를 쓰면 전혀 수정을 하지 않는다고 고백을 하고 있으며 「알렌긴스버그」도 이와 같은 고백에서 인쇄로 16페이지가 되는 시를 하루 오후에 타자해 냈고 인쇄로 3페이지가 되는 「해바라기 경문(經文)」을 불과 20분 걸려 썼다는 것이다.

  예술 없는 예술, 시 없는 시는 바로 선의 예술이요 선의 시다. 또한 가장 표현력이 강한 선시는 언어가 없을 때이다. 선시(禪詩)는 말을 하지도 않고 않지도 않는 상태에서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선화(禪畵)나 선시는 순수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생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17세기에 일본에서 완성한 언어 없는 시「하이구」는 선시의 한 형태로서 좋은 예가 된다. 17음절의 「하이구 」배구(俳句) 어떻게 보면 시제 같기도 하고 혹은 시의 시초 같기도 한 짧은 시로서 잘된 「하이구 」는 독자의 마음의 호수에 순간적으로 던져지는 돌과 같이 독자의 모든 기억과 사념을 완전히 떠난 순간적인 생의 소리가 된다. 송(宋)대의 선화는 주로 자연 풍경을 테마로 하고 있다. 산수, 안개, 바위, 소나무, 새, 대나무 그리고 공간, 이 자연에 사람이 속해 있고 사람은 이 자연을 지배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공간은 선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고 있다. 어느 선화에는 정신이상자 같이 헌 누더기를 걸치고 바보스럽게 웃고 있는 은둔 인이 있기도 하다. 이는 선적인 생활의 「공」을 그린 것이다. 뜻 없는 세월, 뜻 없는 생, 목적의식이  전무한 생활, 행복스럽게 보이는 정신이상자의 아무의미 없는 중얼거림,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선사의 모습 등은 다 이런 것들이 선화에 선택된 주제들이다.

「나르는 기러기는 자기의 그림자를 떨어뜨릴 뜻이 없고 장장히 흐르는 강물은 그 기러기의 그림자를 받아드릴 생각이 없네.」하는 선구가 있다. 그러나 선 예술의 형태가 완전히 우연에 맡겨지는 것은 아니다. 선화나 선시가 그렇게 자연스럽고 자연의 일부분 같이 보이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이원적인 사고방식이 없음으로써 자연과 인간이 대립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정신의 창조적인 힘은 식물이나 기타 생물들의 자체형성과 같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선의 입장에서 보면 예술적인 테크닉이란 자연발생적인 속에서의 수련이고 수련 안에서의 자연발생성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미의 소위 개방 시도 선시나 선예술과 흡사한 동기에서 이루어진다. 아무 목적의식이 없이 떠도는 히피들의 생활, 생각이 가는 데로 말이 흐르는 데로 기록하는 그들의 시는 분명 시가 아닌 시다. 「알렌긴스버그」의 「아메리카」는 그 좋은 예의 하나다.

「아메리카 내가 하는 바를 내가 안다고 다구치질 말어.

  아메리카 오얏 꽃이 지고 있어

  난 여러 달 신문을 읽지 않았어 날마다 누가 살인했다고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