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의 성좌] 8.임제(臨濟) 사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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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의 성좌] 8.임제(臨濟) 사상의 배경
  • 김지견
  • 승인 2007.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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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당(隋唐)시대에 성립한 불교의 각파가 한결같이 왕실과 귀족계급의 보호와 경제적 정치적 지지(支持)에 의지했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천태지의(538~­598)와 수의 양제, 현장(600~­664)의 법상유식(法相唯識)과 당의 고종, 현수(643­~712)의 화엄철학(華嚴哲學)과 측천무후, 불공(705­~774)의 밀교(密敎)와 대종등(代宗等)에서 볼 수 있는 밀접한 교섭은 아주 보기 쉬운 사례이다.

  물론 이와 같은 경향에 정면에서 반대하고, 철저한 「방외(方外)의 사(士)」로서 출가한 사문의 길을 무엇보다도 무겁게 여기던 분들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산의 혜원(334­~416)은 「사문은 왕자를 예배할 필요가 없다.」(沙門不拜父母王子論)라는 주장을 했었다. 불교도로서 만장(萬丈)의 기염을 토했었던 것이다. 남악혜사(515­~577)가 『법화경』의 4안락행의 설에 의해서 국왕 대신에 친근 하는 것을 경계했었던 것과 같은 유훈도 후세에 불교도들의 귀감이 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라도 하계의 속권(俗權)이 멀리 미치지 못한 산상의 승원(僧院)에 있어서의 정신적 귀족으로서의 긍지이며 아주 특수한 사회 내에서 만의 일이었다. 실제로 남조(南朝)에 있어서 청담적 불교(淸談的佛敎)는 일견 속계를 뛰어넘은 듯 했었으나, 거의가 이와 같은 정신귀족 그것이었지, 국가권력과 맞서 대결하고 지도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호족이 지배하는 화북 땅에서 두타행(頭陀行)으로써 출발했었던 중국의 선은 오히려 위와 같은 중국불교의 숙명적인 과제였던 속권과의 대결이었으며, 그 돌파를 실행했었던 매우 희유한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왕조나 귀족 부상(富商)들로부터 재정적 원조나 정치상의 편의를 기대하지 않는 편력자로서의 늘 하층의 민중과 접촉하고, 민중의 생활 속에 파고들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실을 보면 왕실과 귀족들과의 교섭을 떠나서, 늘 민중 속에 있었던 선승들은 귀족불교의 철학자들이 내세운 것과 같은 심원고대하고 번쇄한 교학체계를 주장하지 않고, 그리고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역으로 그들은 상류층 불교학자들이 해내지 못했던 민중들에게 직접 설법을 했었다. 그들은 일상의 구어나, 속어에 의해서 늠름히 실행하며 불교의 진리를 말하고 인간성의 진실을 주장해 마지않았다.

  선은 원래 인도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산림 속에서 명상의 실천에서 시발되었으나 중국 초기의 선승들은 당초부터 언제나 무엇인가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신변(神變)스러운 승으로서 민중의 관심과 신뢰를 모으고 있었던 것 같고 경전의 번역과 강술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의해(義解)의 승들과 다른 사람들로 인정되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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