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종조 선사(大慧宗早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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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종조 선사(大慧宗早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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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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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의 성좌(星座)들(5)

(1)생애와 시대배경

우리 나라 불자로서 경을 배웠거나 禪에 뜻을 둔 분으로 대혜(大慧) 스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대혜 서장(書狀)을 읽지 않고 그만큼 우리 나라 불교와 대혜 스님과는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참선의 기본 요전으로 꼽히는 高俸禪要(고봉선요)와 함께 대혜 고봉 두 스님은 우리 나라 불교에 있어 아직껏 二大甘露門(이대 감로문)이다. 이 짧은 지면으로 대혜 스님의 그림자마져도 짐작하게 할 수는 없지만 우선 약력의 일부나마 소개하기로 한다.

대혜 스님의 생존연대는 1089년부터 1163년에 이르는 715년이다.

이 기간은 중국이 북은 요가, 중원은 송이 웅거하여 안정세를 이루다가 차차 여진이 득세하여 요가 망하고 금이 일어서고 송도 금에 몰려 남으로 달아나 입국하는 어수선한 시기였다.

즉 금이 건국한 것은 대혜 스님이 26세 때이고 요가 망한 것은 35세, 송이 금에 몰려 남으로 달아난 것이 38세 때인 1127년이고 몽고가 득세하여 중국을 차지하게되는 것은 그로부터 약 100년 후가 된다.

이 기간 동안, 대혜 스님은 오직 불도에만 전념했고 담당준(湛堂準) 원오근(園悟勤) 같은 대 종장을 만나 마침내 대사를 마치고는 전 생애를 종문 현창에 바쳤다. 특히 사회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당시의 사대부 등 지식층에게 카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혜 스님의 생애 중 중대한 사건은 형주(衡州)의 귀양살이이다. 금과의 관계에서 강화 파의 수령인 주회(奏檜)에게 주전파인 장구성의 당으로 몰려 의첩(衣牒)을 빼앗기고 형주 매주 등지로 귀양간 것이다. 그것이 52세에서 67세에 이르는 15년간이다. 이 기간에도 갓을 쓰고 설법하여 수많은 법기를 만들어 냈고 정법안장 6권을 저술하였다. 스님의 회상에는 항상 수천 명의 납자가 운집하여 크게 종풍을 떨쳤으니 가위 임제의 중천이었다.

스님은 원오근 선사의 법을 이었으니 남악하(南嶽下) 16세가 된다. 법맥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원마(遠磨)…육조(六祖)…마조(馬祖)…임제(臨濟)…양기방회(楊岐方會)…백운수단(白雲守

端)―오조법연(五祖法演)―원오극근(園悟克勤)―*불안청원(佛眼淸遠)

*대혜종과(大慧宗果)

*대평혜근(大平慧勤)

(2)도(道)를 이루기까지

스님은 송(宋) 철종(哲宗) 원우(元佑)4년에 지금의 안휘성(安徽省)에서 나았다. 속성은 해(奚)씨다. 어려서 향교에서 글을 배웠는데 장난치다가 벼루를 던진 것이 훈장의 관에 맞아 돈으로 변상하고 돌아와서 생각하기를 『대장부아가 세간의 글을 배우느니보다 출세간의 도를 배움만 같지 않다.』하고 출가하였다. 그때가 12세다. 처음에 동산 혜운사에 가서 혜제(慧濟) 스님을 섬기다가 축발하고 널리 종문의 제어록을 열람하였는데 그 중 운문 목주(睦州)어록을 가장 좋아하였다 한다. 부모님의 권유로 제방에 유학하여 조동종 여러 종사를 섬겨 그 종지를 모두 요달 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여러 종장에 참여하여 담당준 선사에게서 깨친바가 있었다. 하루는 준 선사 말하기를,

『너는 이치를 일일이 다 알아듣느냐?』

『네, 다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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