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 벗은 왕새우, 부채(扇) 위에 누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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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 벗은 왕새우, 부채(扇) 위에 누워 있네
  • 관리자
  • 승인 2007.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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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스님/ 평택 아란야 원장 지묵 스님

부채 위에 올려놓은 왕새우가 금방이라도 물을 튀기며 펄떡거릴 것 같다. 빳빳한 지느러미로 활처럼 굽은 등을 펼치며 당차게 튀어오를 것 같다. 지묵 스님은 부채에 왕새우 그림을 즐겨 그린다. 이미 수천 점 넘게 그렸다. 눈에 익은 사군자, 산수화가 아니어서 신기하다. 해로은(海老隱)이란 글씨를 곁들인 큼지막한 부채를 주변 인연들에게 나누어준다.

“남녀가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면 등이 굽을 때까지 해로하라는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또 다른 의미는 여기 그려진 그림처럼 우리 모두 왕새우가 되자는 겁니다. 새끼 새우가 자라 왕새우가 되는 과정에서 한 차례 껍질을 벗습니다. 이 때 새우 몸에서 나는 감미로운 냄새가 물 속 십리 밖까지 퍼집니다. 새우를 잡아먹으려는 뭇 물고기들이 몰려듭니다. 대부분의 새우들은 이 과정에서 죽지요. 껍질을 벗고 살아남아 왕새우가 되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찔하고 처절한 과정이지요. 하찮은 미물도 이런 탈피의 과정을 거치는데 인간은 껍질 벗는 과정이 몇 번이나 되며 그 노력이 얼마나 치열한 가 반성합니다.”

부채에 누운 새우를 다시 보니 노송 아래서 솔바람 쐬며 유유자적 누워 있는 도인 같다. 모진 역정을 헤치고 깨달음에 이른 새우보살이여.

우리는 이웃에게 어떤 존재인가

“부채에 그림을 그리고 부채를 나누어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부채는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입니다.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혀주는 도구지요. 제 몸을 살라 주변을 밝히는 촛불의 공덕에 비할 바는 못 되나, 무더운 날 땀을 식혀주고 나들이할 때는 햇빛 가리개가 되고 소리꾼은 부채 하나 달랑 벗 삼아 대여섯 시간 동안 절절한 가락을 뽑아냅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한다. 서로를 겨누는 창칼은 아닐까. 지옥과 천상에는 똑같은 음식으로 가득 차 있으나 수저 사용법이 다르다. 지옥에는 한발 넘는 큰 수저로 음식을 먹으려니 끝내 한 숟갈도 입에 넣지 못한다. 천상에서는 수저가 비록 한 발이 넘지만 서로 상대방에게 먹여주니 배부르게 음식을 먹는다. 작은 바람 일으켜 덕을 베푸는 나무 부채보살! 바람은 걸림 없는 존재다. “모든 것에서 걸림이 없는 사람이라야 도를 이루어 생사에서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출가 이전인 20대 초반 시절 지묵 스님의 마음을 지배하던 가르침이다. 그래서 지묵 스님에게는 어느 절에 주석한다는 규정이 없다. 송광사 출신 스님일 뿐 바랑을 풀어 놓는 곳이 없다. 그래서 이런 구절을 좋아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을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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