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선불교 환경을 일찍부터 조성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여성으로 낸시 윌슨 로스(Nancy Wilson Ross, 1901~1986)와 엘지 미첼(Elsie Mitchell, 1926~ )이 있다. 두 사람 다 일본으로 가서 선에 대한 안목을 키웠고, 두 사람 다 돌아올 때 선 수행과 선의 정신을 가져왔다.
엘지 미첼은 케임브리지 불교센터를 설립했고, 낸시 로스는 선불교에 대한 책을 다수 저술했으며, 두 사람 다 샌프란시스코 선원과 오랫동안 후원관계를 형성했고 두 여성은 불교수호자로서 서로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낸시 윌슨
소설가이며 세계 여행가였던 낸시 윌슨은 샌프란시스코 선원의 스즈키 순류 선사와 친구가 되면서 선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1932년 최초의 소설 『금요일에서 월요일까지(Friday to Monday)』를 발표한 이래 많은 소설을 발간하며 문인 및 지식인들과 교류하던 그녀는 인생이 익어가는 59세부터 79세까지 3편의 불교 저술, 『선의 세계(The World of Zen, 1960)』, 『세 가지 아시아 지혜(Three Ways of Asian Wisdom, 1966)』, 『불교: 삶과 사고의 방식(Buddhism: A Way of Life and Thought, 1980)』을 발간하여 서양독자들에게 동양의 지혜를 전달하는 탁월한 능력을 증명하였다. 문단에서의 영향력에다 세 권의 불교저술로 인해 그녀는 앨런 와츠, 게리 스나이더, 다이세츠 스즈키, 고빈다 라마와 함께 초기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한 미국인으로 손꼽힌다.
1932년 탁월한 상상력으로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을 내어놓은 올더스 헉슬리는 낸시 로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낸시 윌슨은 선을 이해한 사람으로서 우리들에게 통찰과 사색을 전해준 귀중한 일을 해냈다. 서양인으로서 우리는 개념의 세계에 친숙하도록 교육받았다. 이제는 선의 세계에도 친숙하도록 교육을 받을 때가 되었다.”
비평가들은 윌슨 로스가 서양 사고와 진정한 선철학의 차이점을 탁월하게 설명했다고 평했다.
불경스럽고 위트 넘치던 그녀는 80년이 넘는 풍요한 삶을 왕성한 활동을 하며 보냈다. 워싱턴주의 스포케인시에서 어릴 적부터 인디언,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들을 가까이서 보며 자란 그녀는 장로교 목사와 주일학교 선생님이 인습적이고 겁쟁이라 생각하여 그리스도교를 포기했다. 독일의 바우하우스 예술학교로 유학 중 1939년 중국, 한국, 일본을 여행하며 아시아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소설 작가가 된 이후 스즈키 순류 선사를 만난 그녀는 이후 혼자서 참선을 했다.
“스즈키 노사는 순수한 사람이며 깨달은 영혼이었지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내면으로부터 나왔어요. 나는 자신을 불자로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나는 그의 저서 『선심초심』을 수천 번은 읽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선의 제도권 안에 살지 않았으며 선불교의 위계질서나 수행집단보다는 그 사상과 수행 자체에 더 관심이 깊었다. 그녀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예술작품과 선시를 통한 선이었다.
그녀는 스즈키 선사와 그의 법제자 베이커 선사의 친구였으며 선원의 재원모금에도 늘 큰 도움을 주었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가 사망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샌프란시스코선원에서는 그녀를 보좌할 사람을 보내주었다.
엘지 미첼
엘지 미첼은 하버드대학의 동아시아 프로그램에 방문하는 학자들에게 영어를 교습하면서 아시아와 불교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일본에 3번 방문하여 체류하는 동안 그녀는 후지모토 노사에게 1961년 사미니계도 받았다. 보스턴에서 자라난 미첼의 조상에는 불교와 가까운 사상을 지녔던 초절주의자가 있다.
1959년 미첼은 자신의 집에 선방과 불교도서실을 만들었고, 다이세츠 스즈키를 비롯하여 다수의 일본 노사들이 이 선방을 지원하며 가르침을 폈다. 이것은 미국의 초기 사원 중 하나로서 미국의 서해안에 샌프란시스코선원의 모태가 시작되던 해에 동해안에서도 케임브리지불교회가 시작되었던 셈이다.
1979년 케임브리지불교회는 뉴욕에서 이사 온 모린 스튜어트 노사를 만나면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에 나이 들어서도 젊은이의 순수를 간직한 미첼은 스즈키 순류 노사와 매우 가까웠다. 선불교가 미국에서 첫 발걸음을 뗄 수 있도록 도운 개척자이며 조용한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미첼은 케임브리지선원을 설립하던 해에 스즈키를 방문했다.
당시에는 동부 해안의 선이 몇 십 년 앞서 시작했고 또 스즈키 선사 말고는 라쿠수(조동종에서 가슴에 앞치마처럼 두르는 것)를 착용한 사람을 처음 보는지라 스즈키의 학생들은 엘지 미첼을 매우 존경하고 좋아했다고 한다.
그녀는 스즈키 선사가 스님으로서의 위엄이나 거리감보다는 누구라도 다가갈 수 있는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말한다. 스즈키 선사는 이후 미첼과 서신을 교환하고 동부에 강연을 가면 그녀의 불교센터에 들르기도 했는데 1964년에는 케임브리지불교센터의 회원이 되기까지 했다. 스님이며 선원장이었던 그가 다른 불교센터를 후원하는 회원으로 가입했던 것을 보면 그의 격식없는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미첼 부부는 케이프코드 해변에 있는 만 평 정도 대지를 가진 별장에 스즈키 선사를 안내했는데 그는 그 곳에서 혼자 새벽에는 해변의 바위에 앉아 좌선을 하고 해가 뜨면 집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또 정원의 잡초도 뽑고 낙엽도 쓸며, 커다란 조개껍질에 이끼와 나무열매, 모래로 초소형 정원을 만들어 ‘뉴잉글랜드를 캘리포니아로 가져가겠다’며 동심으로 돌아가곤 했다.
엘지 미첼은 요즘 사람들이 좌선을 마치 무슨 운동이나 조깅하듯 해치우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좌선에 집착하며 좌선이 없으면 불교도 없다고 생각해요. 타력신앙에 대한 느낌은 전혀 없고 100% 자력만으로 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다이세츠 스즈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타력을 선의 일부로 강조했어요. 일본에서는 불교가 심오한 삶의 방식으로 존재하지요.”
나이가 들면서 이제 엘지 미첼은 더 이상 좌선을 하지 않고 챈팅을 한다고 한다.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느껴서이며 또 타력 즉 불보살의 가피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1973년 쓴 『일면불 월면불(Sun Buddhas Moon Buddhas)』에서 자신의 영적인 구도의 과정을 회고록 형식으로 정리하여 출판했다. 최근에는 동물의 권리와 환경을 보호하는 아힘사재단을 설립하여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