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라, 버려라, 나를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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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라, 버려라, 나를 버려라
  • 관리자
  • 승인 2007.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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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장 탐방 /각화사 태백선원장 고우 스님

길이 끊어진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홉 시 뉴스가 없는 곳은 어디일까? 휴대폰도 숨을 멈추고 쉬는 곳은? 작가 정찬주는 그 물음에 답을 제시했다. 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 아홉 시 뉴스가 없는 곳, 쉴 새 없이 울어대는 휴대폰도 저린 떨림을 멈추고 쉬는 곳이 암자다라고.

각화사(覺華寺) 서암(西庵)이 그랬다. 절해고도가 아닌 절해고도로, 탈속이 아닌 탈속의 경지에 서암이 있다. 조촐한 우거에 돌부처처럼 고우 큰스님이 있다. 바람조차 숨을 멈춘 양지쪽 초막 같은 암자에서 선(禪)의 불길을 벌겋게 지피고 있다. 비가 새어서 지붕을 덮은 슬레이트 두 장은 색깔이 다르다. 말끔한 마당만큼이나 혼자 사는 살림살이에 군살이 없다.

중생이라는 착각마저 버려라

가행정진(加行精進)! 평상시에 하는 수행에 탄력을 붙여 더 치열하게 수행하는 것. 2002년 동안거를 기점으로 열다섯 달 동안 스물두 명의 당찬 구참 수좌들이 태백선원의 산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 세 시간만 자면서 열다섯 시간씩 참선 정진했다. 올해 동안거는 아홉 달 기간을 정하고 가행정진 중이다. 그 수행의 정점에 서서 화두의 맥을 놓칠까 감시하고 격려하는 이가 고우 큰스님이다.

버려라. 버리고 또 버려라. 너와 내가 따로 없다. 깨달음도 수행도 별개가 아니다. 우리는 부처가 아닌 중생이라는 착각마저 버려라. 나라는 인식을 앞장세우니 네가 있고 다름이 있고 다툼이 있고 비교가 있고 차별이 있다.

거대한 크레바스처럼 갈라진 사회 갈등에 대한 해법을 주십사는 질문을 먼저 드린다. 언제 우리가 지금만큼 큰 대립과 갈등의 한가운데 선 적이 있었던가. 팔을 치켜들고 삿대질을 해도 돌아서면 늘 머쓱해하고 미안해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원수도 이런 철천지원수가 없을 지경이다. 시퍼런 칼을 들고 이쪽 아니면 저쪽에 서라고 위협한다. 왜 이런 칼날 위에 선 시절이 되었는가.

“내 무슨 큰 도술을 부릴 줄 알아 이렇게 갈라진 민심을 봉합할 수 있겠소. 다만 ‘나’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우선 버려야 할 게요. 나라는 존재가 선행한다는 것은 서구적인 발상이외다. 아집과 편견이라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선행하기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나’가 주인이라는 판단이 선 순간 이미 나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됩니다. 노예의 눈에는 또 다른 노예가 보입니다. 그것이 너지요. 나를 해칠 적으로 보입니다. 나를 부정하고 앞세우지 않으면 덜 극단적이 됩니다. 유연해집니다. 증오가 아닌 연민의 자리가 커집니다. 소모적인 투쟁에서 조금씩 물러서게 됩니다.”

본질을 인식하면 갈등과 싸움이 없다

삶의 이력이 든 수행의 순열함은 얼굴에 나타난다. 노인의 고운 얼굴은 젊음의 고움에 비할 바 아니다. 짙푸르게 성성한 눈썹 가에 맺힌 잔주름마저 참 곱다. 간간이 던지는 선한 웃음을 마주하고 있으니 저자에서 가져온 욕심과 미움이 햇살 맞은 안개처럼 걷힌다. 질기고 독해야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는 속설마저 부질없게 느껴진다. 나라는 것이, 나를 우주의 중심에 놓고 갈퀴를 세운 날들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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