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스나이더는 ‘미국의 불교 수행에서 가장 혁신적인 유일한 양상은 바로 여성들의 참여’라고 말했다. 이는 재가중심불교라는 특징을 가진 미국의 최일선 불교현장에서 보이는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를 가리킨 말이다.
서양에 불교가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한 70년대는 페미니즘의 발전과 시기적으로 맞물렸고, 이로 인해 여성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많은 여성들이 불교에서 영성을 찾았던 결과, 불교역사상 유례없는 숫자의 여성스승들이 배출되어 법문, 강연, 수행면에서 활약을 벌이면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다.
독립적인 자의식을 가진 서양 여성들이 불교수행자로서 마주친 첫 번째 딜레마는 2,500여 년이라는 길다면 긴 불교역사에 여성의 모습이 부재하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바라보고 그를 본받고 싶고 그가 한 대로 따라하고 싶어도 그럴 만한 역할모델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역할모델의 부재는 자신이 여성으로서 불교수행에 부적합한 인간인가 하는 회의마저 느끼게 했다. 이런 문제를 가장 극적인 표현으로 상기시켜준 사람은 독일의 아름다운 재가 스승 실비아 베첼이다.
1993년 다람살라에서 개최되었던 달라이 라마와 함께 한 서양여성불자들의 회의에서 그녀는 자리에 가득한 큰스님들에게 여성과 남성의 입장을 바꾼 다음과 시나리오를 곰곰이 생각해보도록 질문을 던졌다.
닮고 싶은 역할모델
“자! 남성인 당신이 절에 와보니 법당에는 아름다운 타라 보살이 16명의 여성 아라한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지난 14번의 환생에서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한 14대 여성 달라이 라마였습니다. 저만치 당당한 모습의 비구니들이 지나갔고 그 뒤를 따라 수줍은 모습의 비구들이 지나갔습니다. 이 전통 있는 법맥을 이어온 조사들도 모두 다 여성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제 남성인 당신은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한 라마에게 다가가서 묻습니다. ‘왜 이 절에는 여성적 상징과 여성 부처밖에 없나요?’ 여성 라마는 대답합니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마세요. 남성과 여성은 동등합니다. 공에 대해 명상하세요. 공에는 남성도 여성도 아무 것도 없잖아요.’ 이런 환경에서 남성 수행자인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역사 속에서 수행의 역할모델을 갈망했던 여성들의 염원에 맞추어 1970년대 말부터 여성불교 관련서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 효시는 1930년 팔리성전협회의 번역자였던 영국 여성 호너(I. B. Horner)가 출간한 『원시불교의 여성들(Women Under Primitive Buddhism)』이다.
이후 40여 년이 지난 1979년 두 번째 여성불교서인 다이애나 폴(Dianna Paul)의 『불교 여성(Women in Buddhism)』이 나왔다. 위스컨신대학에서 불교학 박사학위를 한 폴의 이 저서에서는 불교 여성이나 여성 원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필요와 여성의 참여 정도에 따라 진화해왔다고 밝혔다.
1979년은 또 여성불교저널이 탄생한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로버트 아잇켄 선사가 주석하는 하와이의 다이아몬드 승가에서 「카하와이(Kahawai: A Journal of Women and Zen)」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불교 관련 책들
아주 오랫동안 이 저널은 여성불자들이 서로에 관한 소식을 알고 불교계 내의 여성적 이슈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소식지였다.
1984년 서양 여성으로 최초의 티벳여승이 된 출트림 알리오니의 저서 『지혜로운 여성들(Women of Wisdom)』이 나왔다. 역사 속에서 잊혀졌지만 깨달음을 이룬 여성들을 발굴하여 수록한 책이다. 이때부터 좀더 많은 여성불교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986년 라이스대학의 앤 클라인이 저술한 『지식과 해탈(knowle-dge and liberation)』이 나왔고, 1988년 샌디 바우처의 『법륜을 돌리며(Turning the Wheel)』가 나와 미국 각계에서 활동하는 여성불자들의 활약상을 폭넓게 다루었다.
1991년에는 장로니게를 현대적이고 쉬운 언어로 번역한 수전 머코트의 『최초의 불교 여성들(The First Buddhist Women)』이 나왔다. 1993년엔 위스컨신 대학의 리타 그로스가 본격적인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불교를 논한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Buddhism after Patriarchy)』가 발행되었다.
1994년엔 리치몬드 대학의 미란다 셔가 티벳불교의 여성원리를 논한 『열정적인 깨달음(Passionate Enlightenment)』을 내어놓았다. 1995년에는 현 사캬디타 회장인 카마 렉시 소오모의 저서 『미국 여성의 눈으로 본 불교(Buddhism Through American Women’s Eyes)』가 나왔다.
여성과 불교회의
여성불자들이 모여서 여성 고유의 관심사를 논하는 대규모 회의도 198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1년 콜로라도주 나로파 불교대학의 주디스 심머브라운 교수는 서양 최초의 여성불자회의(Wo-men in Buddhism Conference)를 주최했고 1982년의 제2차 회의도 주관했다.
이 두 번의 회의에서 진정한 여성주의의 문제와 진정한 불교의 문제가 제시되었고 여성불자들은 매우 성숙한 방식으로 이를 토론했다. 첫 번째 회의에서는 예상 밖으로 약간의 흑자를 냈고, 두 번째 회의에서는 참석자가 2배로 늘어 90명이나 되었다.
1983년에는 숭산 스님의 관음선종에 속한 프로비던스 선원에서 ‘여성과 불교회의(Women and Bu-ddhism Conference)’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특히 미국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선불교 스승들의 문제나 섹스 스캔들이 주제로 떠올랐다.
미국 곳곳에서 자기 지역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 회의에서 편재한 문제로 드러났고 여성불자들은 경악 속에서 스승의 권위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런 스캔들의 여파로 일부 불교센터는 구조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많은 여성들이 문제의 불교센터를 떠나 여성 스승을 찾았고 일부 여성들은 독자적인 수행 그룹을 만들기도 했다. 남아있는 여성들은 여전히 많은 의문을 간직한 채 살았다.
서양 불교계의 여성 스승들
1996년 여성 스님 젠케이 블랑쉬 하트만이 샌프란시스코 선원장으로 취임하였고, 그를 이어 2000년 두 번째 여성 공동선원장으로 지코 루스 커츠가 취임하였다.
미국에서 가장 크고 오랜 역사를 가진 선불교 승원이라서 그저 선원이라고만 불러도 그 곳임을 아는 그런 선원의 최고책임직에 여성이 두 번째로 취임했다는 데서 그 의미가 큰 행사였다. 수백 명의 하객들이 참석한 속에서 취임식은 완벽한 절차를 갖추어 진행되었다.
사캬디타의 국제여성불교대회에서 보듯이 이들은 친구처럼 같은 차원에서 교류하고 협력한다. 개중에는 불교계의 남성중심적·가부장적 문화가 자신의 신념과 충돌을 일으킴을 의식하고 종단을 나와 독립적으로 센터를 일군 여성스승들도 꽤 있다.
또한 가정과 수행을 양립해야 할 필요성, 어린이를 키우는 어머니 역할이 오히려 수행의 방편이 될 수 있음을 제창하는 여성들도 있다. 또한 환경과 인권 문제에서 많은 활약을 보이는 여성불자들도 있다. 앞으로 본란에서는 이런 서양불교계의 여성불교인들을 다양하게 조명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