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를 곡해하면 불교가 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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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를 곡해하면 불교가 싫어진다
  • 관리자
  • 승인 2007.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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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택의 행복 경제

법정 스님하면 생각나는 단어는 ‘무소유’라는 단어다. 무소유의 여러 의미가 있지만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맑은 가난함’ 즉 청빈으로 생각하는 어느 고객에게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맑은 가난이건 탁한 가난이건 가난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 어느 고시 합격생의 고시합격기 중에 있던 “가난은 죄가 아니다 단지 불편할 뿐이다”라는 구절은 대다수 가난 속에 힘들어 하던 사람들에게 아주 근사한 핑계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내게 가난은 어린시절의 아련한 향수, 고향, 그리고 꿈이 있던 시절, 맑음 등이 생각나게 하는 단어다. 실제 가난에 치를 떨어보지 않은 한가한 회상인 것도 사실이다.

가난 때문에 온 가족이 흩어지고 집안이 조용할 수 없었다는 내 친구도 가난이라는 말의 의미는 나와 비슷한 것이 많았다. 그 전쟁터 같은 집안을 나와 동네에서 축구하며 바라보던 저녁놀이라든지 혹은 스케이트 사달라고 조르다가 아버지한테 늘씬하게 두들겨 맞았던 것도 돌아가신 아버님을 이해하고 그립게 하는 것들이라고 맞장구치던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던 ‘가난한 날의 행복’이라는 수필을 이야기한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지금의 20, 30대는 가난을 우리 세대나 전 세대처럼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난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남한테 피해를 주는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다.

예전처럼 수명이 60세이고 그래서 정년퇴직이 60세가 되는 세상도 아니다. 수명은 80, 90세로 늘어나고 있으며 정년퇴직이라는 말은 이제 역사유물 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다. 45세가 넘으면 예의상 집에 가 주어야 한다는 소리들도 나오는 판이다. 이러한 현실에 무소유나 가난은 아무런 대안이 되지 못한다.

설사 지금 가난하지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직장생활을 하며 유리로 된 월급봉투에서 이것 저것 뜯겨 본 사람은 자신이 가난하다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지금 온 세상이 돈, 돈 하는 것은 도덕성 타락이 아니라 과학의 발전 속도를, 사회발전을 책임진 지도자들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포함한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과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것도 월급 가지고 투쟁하는 근로자들의 편을 드는 사후 약방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싸우지 않고도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거나 혹은 투쟁의 원인 제공을 한 사람들을 상대로 기도하고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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