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무도로 포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상태바
선무도로 포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 관리자
  • 승인 2007.10.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스님 /경주 골굴사 적운 스님

불연(佛緣)을 맺고 난 뒤 신라 천년 고도 경주는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래 늘 그립고, 발 디디면 그저 좋다. 바람결도 살갑고 돌멩이 하나도 반갑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경주 하면 골굴사가 그려졌다. 대중매체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골굴사에서 선무도를 배우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마치 화랑이 환생한 듯했다. 웰빙 시대, 대중포교의 새로운 장을 연 것 같아 환희로웠는데, 그 선망의 골굴사, 적운 스님을 찾아뵙게 되었으니, 전날부터 잠을 설쳤다.

예정된 불사, 출가 인연 이야기

골굴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풍광이 아름다웠다. 바위산에 조성된 굴법당들도 신이로웠고, 암반 정상에 모셔진 마애아미타불(보물 581호)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도량의 웅장함에 더 놀랐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자그마한 인법당 한 채밖에 없었다는데, 새로 지은 큰법당, 선무도 대학 본관 건물, 수련생 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생활관, 요사채가 번듯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무(無)에서 유(有)를 일구신 적운 스님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골굴사는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 스님 일행이 인도식으로 지은 국내 최초·유일의 석굴사원입니다. 겸재 정선의 골굴석굴도가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토함산 산중일기를 쓴 정시한 선생은 ‘단청을 한 석굴사원의 모습은 마치 한폭의 병풍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고 기록하여 당시 골굴사의 모습을 전하고 있지요.”

함월산의 불교 유적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골굴사는 절이 창건되기 이전에도 이 지역민들의 숭앙을 받았다.(지금도 치성을 드린 공덕으로 태어난 이들의 참배가 이어진다는, 골굴사 법당 옆 남근바위와 여궁 자리에 모셔신 산신당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 지역 정신문화의 산실이었던 골굴사는 안타깝게도 조선 중후기에 화재로 소실된 이후 방치되어 왔다. 70여 년 전 오두막 같은 태고종 사설사암이 지어졌고, 89년도에 적운 스님과 인연이 된 지 십수 년 만에 오늘과 같은 도량이 일궈졌으니 사람이든 절이든 좋은 인연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 부처님 가피로 이루어졌지요. 여러 생 동안 골굴사와 기림사에서 살았다는 것을 수행하는 분상에서 느꼈어요.”

스님은 경주 설씨다(원효대사 46세손). 어릴 적부터 부친에게서 “우리는 원효 대사 후손이니 그 거룩한 뜻을 본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자랐다.

“스님만 보면 마냥 좋아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싯다르타』를 보며 사색에 잠긴 모습을 보시고는 아버님께서 ‘너는 절에 가야 한다’는 말씀을 줄곧 하셨지요.”

출가를 꿈꾸었는데, 스무 살 되던 해, 신비로운 체험으로 출가를 앞당기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등산을 왔다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기림사 오백나한전 앞 장군탑에 손을 대는 순간 찡하고 마음이 울리면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기림사에서의 전생 일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듯했던 것이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