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남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다. 나의 이익 추구가 다른 이의 이익 추구와 늘 서로 충돌하게 되어 있고, 나의 기쁨이 다른 이의 괴로움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도 『화엄경』 「보현행원품」 수희분에서는 “남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하라.”고 한다.
남이 짓는 공덕을 왜 함께 따라 기뻐해야 하며, 왜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타인은 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이 성립하는 것일까? 바로 동일생명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즉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생명관에서 출발하므로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들을 볼 때 현상적으로는 개개의 생명체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혜의 눈으로 보면 실은 모두 상호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위 전체가 하나에 들어 있고 하나가 바로 전체라는 사상(一切卽一·一卽一切), 비유컨대 풀 한 포기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고 하는 사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만든다. 이렇게 모두가 하나의 생명체라고 자각할 때 비로소 나와 남이 동일생명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현실적으로 과연 가능한 일이며, 어디 그것이 쉬운 일인가?’라는 반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한 가지 일화를 들어보자. 어느 마을에 빵 가게가 있었는데, 주인은 자기네 가게에 온 손님들이 자신이 만든 빵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게문을 열고 청소를 하다보니 길 건너편에 새로운 빵 가게가 하나 생긴 것이 아닌가? 그 날 이후, 빵 가게 주인의 하루일과는 일변해버렸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좀더 빵을 맛있게 만들 것인가?’ 궁리하는 게 아니라, 건너편 가게에 손님이 얼마나 들어가나, 우리 집 손님이 가지는 않나를 쳐다보기 위해 종일 불안에 떠는 생활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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