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처에서 깨달음을 이룸을 알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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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처에서 깨달음을 이룸을 알지어다
  • 관리자
  • 승인 2007.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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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법석/설잠

해동 불교가 맞이한 가장 큰 시련 가운데 하나는 조선 초 태종대의 척불(斥佛)일 것이다. 이후 세종, 세조를 거치며 약간의 중흥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조선 건국 세력에게 불교는 철저히 배척 당했다. 이 시기 해동 불교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분이 설잠 대사이다. 당대의 천재로, 문사(文士)로 이름 높던 매월당 김시습이 바로 설잠 대사의 속명이다.

3세에 시를 짓고 5세에 중용과 대학을 통달한 신동 김시습은 조선 초 시대 상황만큼이나 역동적이고 극적인 삶을 사신 분이다. 18세 되던 무렵 선사 준상인(峻上人)을 만나 선의 세계를 접하고, 21세 되던 해인 1455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출가하였다. 설잠의 출가는 세조의 정변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세상을 품고도 남을 신동은 신하의 불충(不忠)에 격분했고, 이후 그의 행적은 권력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선지식과 도를 찾아 방랑하는 운수의 길이었다. 29세부터 효령대군의 청으로 경전 번역에 힘쓰기도 했으나, 31세 되던 세조 11년 경주 금오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며 7년을 주석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완성하였다.

47세 되던 해에 환속하였으나, 관동지방 등을 다니다 충청도 무량사에 정착한다. 설잠 대사의 수계 득도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점, 머리를 깎고 수염을 길렀던 행적과 알려지지 않은 수행 과정, 환속 때문에 설잠이 비구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함허 기화 대사에서 허응당 보우 대사에 이르기까지 해동 불교학의 공백을 잇고 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의 현존하는 저서는 『연경별찬(蓮經別讚)』 『화엄석제(華嚴釋題)』 『대화엄법계도주(大華嚴法界圖註) 병서』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매월당시사유록(梅月堂詩四遊錄)』 『시사유록 별집(別集)』 등과 선시 등을 모아 놓은 『매월당전집불교관계시문초(梅月堂佛敎關係詩文抄)』 등이 한국불교전서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대화엄법계도주』는 한국 불교 사상 손꼽히는 의상 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대한 가장 탁월한 주석서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연경별찬』은 바로 『법화경』의 사상과 선(禪) 사상의 융합을 시도한 저술이다.

이는 설잠 대사가 자신만의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추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연경별찬』은 『법화경』의 각 품마다 그 내용을 요약하고, 시(詩)로써 선과 법화 사상의 하나됨을 표현하는 독특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호에서는 『법화경』의 각 품에 대한 요약과 시로써 그 선적(禪的) 경지를 표현한 내용 가운데 일부를 각 품별로 소개한다. 이번 호의 내용은 『법화경』의 가르침을 화두와 같은 선시(禪詩)로 정리하여 그 내용을 이해하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다. 원문은 『한국불교전서』 7책 287쪽에서 294쪽에 실려 있다.

연경별찬(蓮經別讚)

「서품」을 찬탄하여 말한다.

부처님께서 오셔서 가르침을 펴신 그 큰 인연은 참으로 깊고 오묘하도다. 일체의 성현과 범부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로다.

검은 산 아래에서도 땅을 움직이는 빛을 발하였고, 죽음의 물 가운데서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였도다.

「방편품」을 찬탄하여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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