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 물 마실 힘도 없이 어찌 바다를 삼키겠는가
상태바
연못 물 마실 힘도 없이 어찌 바다를 삼키겠는가
  • 관리자
  • 승인 2007.09.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승법석15 /대각국사 의천(義天 : 1055 ~ 1101)

국사 께서 활약하던 11세기 전후 고려와 중국은 역동적인 변화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중국은 당의 멸망과 송의 부침, 요 나라의 등장 등의 격변기였고, 고려는 중기로 접어들면서 화려한 귀족 문화와 귀족 지배 체제가 완비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격변기의 정세 속에서 고려 불교 역시 교종이 다시 전면으로 등장하였으며, 이 가운데서도 화엄종과 법상종은 그 세력을 크게 넓히고 있었다. 고려 불교는 국교로서 그 어느 때보다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새로운 국가 이념의 필요성과 함께 그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고 있었다. 대각국사 의천은 이 무렵 고려 11대 문종 9년(1055년) 왕자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후(煦)였으며, 의천은 자였고 대각국사는 시호이다. 국사는 11세에 출가하여 화엄종의 경덕국사 난원(爛圓) 문하로 출가, 불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영통사에서 수행하였다. 문종 23년 15세 되던 해 문종의 원찰(願刹)인 흥왕사에서 “뛰어난 음성으로 백천 법문을 설하여 사람과 하늘의 한량없는 대중을 놀라게 했다.”

19세에는 당시 세자를 대신해 많은 논서를 수집할 것을 발원하여 『대세자집교장발원소(代世子集敎藏發願疏)』를 지어 경장 간행과 보급에 일생을 건 국사의 면모를 드러냈다. 『발원소』에서 국사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펴심은 참되고 영원한 진리를 홀로 즐기시는 데 그치지 아니하시어 … 큰 자비로 중생을 일깨워 주셨으며 … 이제 정법이 쇠퇴하고 중생들의 근기가 점차 둔해지며 … 가르치신 바 이치를 널리 받들어 펴고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편다면 이로써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다했다 할 것”이라고 피력하였다.

이후 송으로 건너가 3천여 종에 이르는 논서를 수집해 귀국했으며,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간행하였다. 이 밖에도 송에서 국사는 화엄, 유식, 천태, 법상, 율종, 선종 등의 당시 53인의 석학들을 두루 만나 구도행을 실천했다. 국사는 방대한 논서와 장경 등을 펴내는 한편 원효 성사를 깊이 숭앙하여 성사의 『화엄경소』 일부와 『금강경소』 등을 중국에 전하였으며, 중국에서는 중국 저술에 관한 문의까지 국사에게 의뢰할 정도로 해동 불교의 중흥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국사는 중국 정원(淨源) 대사의 법통을 이어 중국 화엄종을 부흥시키기도 하였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