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 씨의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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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 씨의 이메일
  • 관리자
  • 승인 2007.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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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소설

 

소설가 구보 씨는 아침부터 기분이 엉망이었다. 오전까지 보내기로 한 단편소설 원고가 말썽이었다. 지난 밤 새벽까지 탈고를 하여 C드라이브와 디스켓에 분명히 담아두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디스켓을 열어보니 C드라이브에 있던 원고는 감쪽같이 사라졌고 플로피 디스켓에 담겼던 원고는 파일의 이름은 있는데 디스켓 에러라는 메시지만 뜰 뿐 그 내용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급한 마음에 컴퓨터를 다룰 줄 안다는 친구와 후배들에게 전화로 해결방법을 문의해 보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구보 씨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구사하여 컴퓨터 초보인 구보 씨를 더욱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다. 바이러스가 침투를 했거나 아니면 저장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게 그들의 대체적인 진단이었는데, 그것을 해결하는 법은 응답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뿐만 아니라 구보 씨로선 쉽사리 손을 대기가 곤란한 경우였다.

그렇다고 한창 바쁜 월요일 오전에 그들을 부를 수도 없었던 구보 씨는 할 수 없이 자신이 일주일 내내 끙끙거리며 만들었던 100매 가량의 원고를 다시 입력시켜야 했다.

구보 씨가 볼펜으로 잡아놓았던 초안을 비롯해 프린트를 한 뒤 수정을 했던 원고가 남아있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한번 입력했던 원고를 똑같이 입력하는 일이야말로 소설가인 구보 씨를 짜증스럽게 했다. 그 짜증스러움을 부채질하듯 원고를 청탁했던 계간 「문학과 미래」의 편집장은 아침 10시도 되기 전에 원고를 독촉해왔다.

“어머, 탈고를 하셨다구요? 그럼 지금 이메일로 보내주시겠어요?”

구보 씨가 “원고는 다 됐는데…”하고 뒷말을 이으려는 순간 마흔이 가까운 그 노처녀는 재빨리 그렇게 초를 치고 나섰다.

“이메일 주소는 알고 계시죠? 뭐, 저희 잡지 구독하시니까 제가 안 불러드려도 아실 거예요.”

구보 씨는 노처녀 편집장의 노련한 화술에 휘말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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