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스님의 뜻을 올곧게 이어 반야바라밀 국토를 성취해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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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스님의 뜻을 올곧게 이어 반야바라밀 국토를 성취해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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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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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불광회 법주 직무대행 지정 스님

불광회 초대법주이시고 월간 불광 발행인이신 금하당 광덕 큰스님의 열반으로 지난 6월 20일 불광회 2대 법주로 추대되신 지정 스님(본지 발행인)을 모셨다.

지정 스님은 1965년 광덕 큰스님의 문하로 출가, 해인사 강원에서 일대시교를 마치시고 제방선원에서 안거 정진을 거듭하는 한편 수십년간 중생교화에 진력해 오셨다. 선(禪)과 교(敎)와 율(律)을 구족하신 지정 스님은 실천적 보현행을 강조한 스승 광덕 큰스님의 뜻을 올곧게 이어 많은 이들의 신망을 받고 계시다.

스님, 불광회 법주로 추대되셨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지난 2월 29일 은사스님께서 열반하신 이후로 우리 형제스님들과 불광 불자 여러분들께서 논의 끝에 나를 법주로 추대하겠다고 해서 극구 사양했습니다. 은사이신 금하당 광덕 큰스님께서는 다 아시다시피 이 나라 불교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이요, 한국불교의 대중화·현대화에 새로운 장을 연 선각자이십니다. 너무나 훌륭하시고 대단한 법력을 갖고 계신 은사스님의 법을 내가 잇는다는 것이 힘에 너무 벅차기 때문에 고사했던 것입니다. 사제들의 간청에 많은 갈등을 느껴오다가 법주 직무대행으로 수락했습니다.

법주스님이 연만하셔서 직무 보따리를 힘겹게 들고가실 때 보따리를 들어드리는 심정으로 열반하신 은사스님께서 남기신 직무 보따리를 들어드리는 차원에서 수락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신 지 2,500여 년이 흘렀어도 우리가 늘 부처님과 그 법을 따르는 것처럼 은사스님께서 열반에 드셨어도 저희들이 귀의하고 있는 법의 상징으로서의 법주의 위는 변함없이 계속되어져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은사스님의 사상과 원력을 받들어서 모든 사부대중이 힘을 합쳐 불광을 잘 이끌어 갔으면 합니다.”

34년 전 광덕 큰스님께서 봉은사 주지로 계실 때 출가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출가 인연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절에서 태어나 아버님의 염불소리를 들으면서 성장했습니다.

감수성예민한 사춘기 때 춘원 이광수 의 소설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사랑』, 『이차돈의 죽음』, 『원효대사』, 『마의태자』 등등. 왜 그렇게 좋은지 춘원의 소설에 매료되어 두 번 세 번 읽은 것도 있었지요. 춘원의 소설은 거의 대부분 그 밑바탕에 불교사상이 흐르고 있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절에서 자라면서 훈습된 데다 춘원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감동이 증폭되어 출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능가 스님께서 추천장을 써주셔서 삭발입산하게 되었지요.”

봉은사에서 행자를 지내셨는데, 그 당시는 광덕 큰스님께서 조계종 종헌 종법을 제정하는 등 종단의 기강을 세우시고, 대학생불교연합회 초대 지도법사를 맡아 직접 지도하시면서 봉은사에 대학생수도원을 설립, 운영하시던 때라 행자 소임도 만만찮았을 듯싶습니다.

“힘든 거야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대학생수도원은 별개로 하더라도 그 당시 흥교, 홍교, 양익, 관조, 영환 스님 등 주로 은사스님의 사제이신 범어사 스님들 30여 명이 봉은사에서 살았습니다. 전 대중이 새벽 3시에 예불한 후 6시까지 좌선하고 아침공양을 했는데 그 많은 대중들 공양을 다 지었습니다. 공양지을 때는 그나마 힘든 줄을 몰랐어요. 양식이 없어 밥을 못 지을 때도 있었고 좋은 반찬은 생각조차 못하던 때라 채마밭을 더욱 열심히 가꾸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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