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한철 산천을 풍미하던 단풍이 위세를 잃어가는 늦가을, 사위가 어둑어둑해지는 무렵이다. 청년은 낯선 스님 뒤에 서너 걸음 처져서 걷고 있다. 송광사 가는 길을 묻는 청년에게 스님은 따라 오라는 말만 하고 앞장서 걷는다. 비장한 질문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저 따라오라니, 섭섭하고 야속하다. 길을 묻는 이에게 앞장서 길을 안내하는 것이 최선이거늘, 청년의 불끈 쥔 주먹과 어깨와 팔이 아릴 지경이다. 26년간 맺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결연한 의지로 출가 길에 오른 청년은 못내 서운하다.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송광사에 도착했다. 객사에 보따리를 던져 넣고 다짜고짜 불이 켜진 스님 방으로 들어갔다.
“스님, 출가하러 왔습니다. 받아주십시오.”
“왜 출가하려 하시는가?”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를 참구하려고 합니다.”
“뭐시라? 허!”
아스라한 옛일을 회억하며 스님은 붉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훑는다. 느닷없이 밤길을 걸어 송광사에 들이닥친 청년이 지금의 현봉 스님이고 가당찮은 청년의 말에 어안 벙벙해하던 스님은 활안 스님(천자암 조실)이다.
“수십 년 지난 일이지만 낯이 화끈거립니다. 용기와 만용을 구별하지 못하던 몽매한 시절이었지요.”
송광사로 출가 인연은 우연과 필연이 엉켜 있다. 동해남부선을 타고 설악산 쪽으로 출가의 방향을 잡았는데 역에 도착하니 기차가 5분 전에 떠나버렸다. 다짜고짜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이 하동이고 부랴부랴 방향을 잡은 것이 송광사행이다.
“이튿날 날이 밝자 경내를 살펴보니 이거 원! 단박에 자라목이 되고 말았습니다. 헤픈 객기가 요동칠 가람이 아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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