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성품이 아미타불이요, 이 마음이 바로 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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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성품이 아미타불이요, 이 마음이 바로 정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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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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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 탐방/서울 삼각산 정토사 설산(雪山)스님

행복과 불행의 수레바퀴 속에서 울고 웃는 삶, 개개인의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지만, 이 사회가 함께 짓고 함께 받는 공업중생으로 살아가며 느끼는 비애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신문지상을 메우는 혼란한 사회상을 대할 때마다 이것은 화두처럼 다가온 문제였다.

삼각산 정토사 설산 스님, 일제 때 의병의 손자로 태어나서 우리 민족의 뼈아픈 현대사 속에서 평생토록 나라와 민족이라는 화두를 안고 살아온 수행자의 삶은 아름다웠다. 이제 스님은 누구랄 것 없이 고민해오는 개인과 사회의 행복과 불행을 초월하여 그지없이 맑고 깨끗한 정토에서 노닐고 계셨다.

스님, 건강은 여전히 좋아보이십니다.

"특별히 아픈 데는 없지만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지요. 절룩거리면서 살다 보니까 척추에 무리가 와서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오래 걸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 육체를 비롯해서 삼라만상의 현상계가 무상(無常)한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불편하지도 않고 아픈 데 마음을 두지도 않으니 건강하다고 할 수 있지요.

스님, 학도병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몸소 발가락을 자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혜화전문 동기생 등 십칠팔 명이 모여 불출회(不出會)를 조직하고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하려 갖은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젊은 학도들이 죽고 없어지면 우리 조국은 언제 찾나'하는 괴로움을 삼키면서 입소 일주일 전 만해 스님께 인사드리러 가서 학병으로 출전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자, '죽지 마라, 이놈들아'하는 벽력 같은 만해 스님의 호통에 심우장이 무너지는 듯했지요. 그래 일제의 희생자가 될 수는 없다는 각오로 왼쪽 발끝을 선로위에 얹었던 것입니다.

네 발가락을 잘리우고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는데, 학병 거부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형사들이 병실에 상주하다시피했습니다. 심문을 하고 또 하고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지요. 만일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이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님, 스님의 친가 할아버지와 불가(佛家)의 할아버지벌되는 만해 스님께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의병으로 활약하다 왜제의 총상을 입고 건봉사로 은신하셨던 할아버지께서는 건봉사에서 부목노릇도 하셨지요. 할아버지께선 늘 '준용아, 조선을 잊지 말아라. 앞에 서라, 뒤에 서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앞에 서서 조선을 찾아야 한다'시며 학업에 열중할 것을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어릴 때부너 망국의 슬픔 속에서 사시면서 나라를 찾기 위해 애쓰시던 할아버지 뜻을 뼈속깊이 느끼면서 자랐지요.

또한 독립운동하다가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출가하셔서 건봉사를 발전시킨 금암 스님의 시봉을 들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건봉사에는 금암 스님 외에도 독립운동하시던 스님들이 많았는데, 만해 스님도 금암 스님의 심부름으로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만해 스님께서는 항상 '의병손자야'라고 부르셨는데, 언젠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느냐고 물으시길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을 배우고 있다'고 대답했다가 '민족사상이 있어야지 계급사상은 안 된다'고 크게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우리 봉서소년회에서 창간한 필사본 문에지의 이름을 만해 스님께서 '글동산'이라 친히 작명해주시며너 '시는 손끝으로 쓰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쓰는 것'이라고 이끌어주시기도 했습니다. 만해 스님을 흠모하며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거울삼아 살아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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