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무일물(無一物)
상태바
본래 무일물(無一物)
  • 관리자
  • 승인 2007.09.1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집 / 마음

한 이틀 폭설이 내렸다. 대숲에 내리는 눈은 언제나 어여쁘기 그지없다. 낮은 산과 대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두터운 흰 눈을 이고 더욱 나즈막히 잦아들었다. 이런 날은 마을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 평소 시끄럽던 숲 속의 어치떼들도 조용하기만 하다. 향 한 자루 세우고 좌선에 들고나니 머릿속이 잘 닦아놓은 유리알처럼 투명하다. 오늘은 뒤꼍에 묻어놓은 김장독이나 씻어 놓아야 겠다.

엊그제 새벽, 차창에 소리치듯 달려드는 눈발을 뚫고 딸아이와 나는 등교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자연 속 생활을 소복히 누리는 대가로 우리 부부는 이제 고등학생인 딸아이의 등하교를 시내에 있는 학교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책임져야 한다. 전날 저녁 얼어버린 길 위로 눈이 쌓여 조심스런 마음으로 운전을 하면서도 우린 조금 유쾌한 기분이었다. 동네어귀 삼거리 못미처 다리 앞에서 갑자기 차가 미끄러지면서 낮은 언덕에 차의 우측면을 가볍게 충돌하였는데, 딸 아이는 말이 없었고, 약간의 노력 끝에 차가 길 위로 다시 올라섰을 때, 우린 같이 소리내어 웃었다. 걱정하는 엄마에겐 비밀로 하기로 무언의 약속을 하면서 .

차가 미끄러질 당시 나는 사실 약간의 방심을 하였는데, 그것은 요즈음 세상살이의 그 아우성 속에서도 눈은 하늘 가득 내리고, 산과 수목은 의연히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는 사실에 새삼 경외감을 느끼던 중이었다. 운전할 때는 운전만 하라시던 스승의 가르침을 잊고 잠시 마음을 놓쳤던 것이다.

다시 어려운 시절이 돌아온 모양이다. 눈을 돌리면 온통 아수라장의 시끄러운 소리 소리들로 가득하다. 경제가 파국이니, 도산과 실업사태, 위기와 파탄이니 하면서 도처에서 무너져 내리는 소리들뿐이다. 게다가 큰 선거를 앞두고 열이 달아오른 눈빛들과 핏줄이 잔뜩 돋은 비난과 성토, 분노의 목소리들이 세상 가득 들 끓고 있다. 모두들 누구에겐가 책임을 지우려 악을 쓰면서도 자신들은 수퍼마켓으로 달려가 생필품을 잔뜩 사다가 집에 쌓아 놓는다고 한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