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 창간 50주년] 현상을 넘어선 보편과 하나 - 선불교의 근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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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 창간 50주년] 현상을 넘어선 보편과 하나 - 선불교의 근본 성격
  • 서옹 스님
  • 승인 2024.03.2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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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불광 ④ 1985~1987
사자후(獅子吼) | 서옹 스님(전 조계종 종정스님)

불교융성과 시대 발전

한국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우리 민족이 가장 잘 단합되었을 때가 바로 불교가 융성했을 때 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법이야말로 모든 인간과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보편적 바탕 원리로서 여러 가지 개체라든가 특수한 현상들이 여럿이 아닌 하나임을 밝혀줍니다. 

불교는 하나라는 바탕에서 자유자재하게 사는 종교이기 때문에 불교를 믿을 때, 모든 것을 통합하고 화합시킴으로써 민족이 혼연일체가 되어 잘 단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사회적으로 공평하고 단합하고 전쟁 없이 평화로울 때 크게 발전합니다. 전쟁이 있다든지 서로 불평하며 분열되면 곧 쇠퇴하고 맙니다. 

한국 역사 가운데 단합이 제일 잘되었을 때가 바로 불법의 바탕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민족이 평화스럽고 세계 인류가 행복하게 살자면 불법이 다시 크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종의 참된 의미

그러면 이제부터 선(禪)에 대해서 얘기할까 합니다. 불교에는 여러 종파가 있는데 우리 한국에도 19개 종파(1985년 기준-편집자 주)가 있다고 합니다. 가령 8만 대장경 가운데 법화경이 부처님의 경지를 가장 바르게 전한 것으로 생각해서 세워진 종파도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화엄경이 그렇다고 생각해서 세워진 종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의지하는바 경전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종(禪宗)만큼은 의지하는 경전이 없습니다. 선종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근본 자리를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대로 그 자리에서 깨닫고 생활하는 불교이지, 경전에 의지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말하기를,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서 ‘문자를 쓰지 않는다’, ‘교 밖에 따로 전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8만 대장경을 교 안이라고 할 때, 교 밖이라는 것은 8만 대장경 밖에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사람 마음을 바로 가르쳐서 견성성불, 그 마음 성품을 보는 것이 성불이고 부처를 이룬 것이지 따로 부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야말로 선종에 있어서의 근본 표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가령 불립문자에서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니까 모두 그 문자를 부정해 버리고 8만 대장경도 부정해 버리는 것이 깊은 선의 경지라고 오해하고 아주 무식한 것이 선인 줄 아는데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참선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

참선이라는 것은 생사와 절대 모순이 빠져 한 덩이가 되어서 의심해 들어가서 결국에는 무의식 상태가 돼서 의식이 끊어져 이것을 초월해 생사가 없는, 자기 참모습에서 자유자재하게 살 수 있는, 참으로 인간의 올바른 실존에서 구경의 실존에서 자유자재하고 적극적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영원의 생명체를 해결하는 것이 선입니다.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한 참으로 인간 본래면목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한 자기 참모습, 다시 말해서 보통 일상생활에서의 의식은 전부 자기 소견대로 주관적으로 뭉쳐서 된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색안경을 쓰고 환상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실이 확실한 사실이라고 믿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모두 환상 환각입니다. 주관이 뭉쳐서 현실의식으로 된 것입니다. 

의식과 무의식을 타파해서 완전히 주관이 없는 본래의 자기 참모습의 자리에 가야 그게 환각이 아니라 참으로 진실한 자기본래 모습인 것입니다. 참다운 인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다운 인간상에서는 말하는 것도 참다운 것이고, 생각하는 것도 참다운 것이고 참모습의 자격을 갖습니다. 

말하자면 이성과 감성을 초월한 자기 참모습 자리에서 다시 참모습 작용으로 이성으로도 작용하고, 감성으로도 작용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참모습, 높은 차원에서는 문자가 바로 참모습의 작용, 표현이라 문자를 얼마든지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므로 선종 계통에서 문자로 된 어록이 다른 종파보다도 더 많이 역사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문자를 얼마든지 자유자재하게 그 높은 경지에서 작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불립문자입니다. 불립문자라고 하여 문자를 아예 못 쓴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의 그 이성적 감성적 문자는 못 쓴다는 것입니다. 그 이성과 감각 감성을 초월한 자기 본래면목, 참다운 인간상 그 차원에서 문자를 사용하고 그런 초차원적인 경지에서 문자를 사용해야 그게 옳은 문자지 이성, 감성, 보통 말하는 의식, 알음알이, 지혜로 문자를 사용하면 진리와는 틀리고 우리 본래면목 인간상과도 틀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립문자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올바른 문자를 사용하자는 것이지, 그 문자를 못 쓴다는 게 참선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음알이로, 의식으로, 지혜로 8만 대장경을 자꾸 읽고 연구하니까 우리가 자유를 못 얻고 오히려 8만 대장경의 노예가 되어 올바른 불법을 모르고 깨닫지를 못하고 삽니다. 

알음알이를 초월해서, 그 의식을 초월해서 자기 참모습 자리에서 8만 대장경을 보면 그것은 쉽게 말하는 교가 아니라, 교외별전에 대한 교내가 아니라 그것이 선지입니다. 조사의 종지입니다. 그 자리에서 보면 8만 대장경만 부처님 조사의 종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말하는 모든 말소리가 전부 부처님 종지이고 조사스님 선의 종지입니다. 

그뿐 아니라 물소리나 바람 소리, 새소리 등 전부가 선의 종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의 참모습 자리에 못 가고 의식에 떨어지고 분별에 떨어져서 보면 8만 대장경은 고사하고 조사스님의 어록까지도 참 법문이 아니라 분별 망상입니다. 거룩한 어록도 잠꼬대 소리밖에 안 됩니다. 

그러므로 불립분자 교외별전이라는 것은 ‘무식해야 된다’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선에서 깨달은 경지는 인간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 자리 참모습입니다. 선이라고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한 모습으로 이상하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이 세상에 한 번 나서 자기 참모습을 올바로 알고 깨닫는 것이 참선이지 절대로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 자기 마음, 사람 마음, 근본 마음 그 자리가 부처지 따로 성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자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허공과 같이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과 자연 그리고 대우주가 모두 하나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버리니까 대자대비한 마음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하나고 우주가 하나라는 바탕에서 서로 부처님처럼 존경하고 서로가 자비심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돕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지입니까?

선법문은 그 의식도 초월한 높은 차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법문은 여러 가지 해설을 하면 의식의 경지에 떨어지고 알음알이의 경지에 떨어집니다. 자기의 참모습과는 어긋나 버립니다. 선법문은 선법문대로 의식이 끊어진 자리에서 활발하게 말한 것이니까 그렇게 신심으로 마음을 텅 비우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낭야(琅琊) 스님이 계셨습니다. 낭야 스님은 분양(汾陽) 스님의 제자인데 자명(慈明) 등 그 외 여러 도반과 같이 분양 스님 회하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무척 추운 지방이었는데 분양 스님께서는 낭야 스님을 단련하기 위해 재를 뿌리고 찬물도 뿌리고 나가라고 해도 낭야 스님은 나가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하여 임제종 선을 크게 일으켰다고 합니다. 

어느 날 장수 스님이 낭야 스님께 여쭙기를 “허공과 같이 깨끗한 게 법계라고 하는데 어찌 산하대지(山河大地) 차별이 복잡하게 건설이 되어서 시끄럽게 되었습니까?” 하고 의심이 나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낭야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청정본연(淸淨本然)커늘 어찌하여 홀연(忽然)히 산하대지가 생겼다고 하는가?” 하시며 큰소리로 꾸짖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먼저의 홀생산하대지(忽生山河大地)와 나중의 홀생산하대지와는 내용이 다릅니다. 먼저는 산하대지 있는 것이 문제였는데, 여기서 낭야 스님 대답에서는 “어디에 산하대지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장수 스님은 깨달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천동각(天童覺) 스님이 송하기를 ‘견유불유(見有不有) 번수복수(飜手覆手)로다’ 하였습니다. ‘유를 보고 유가 아니고, 있다고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한다’ 하고 ‘손을 뒤집고 손을 엎음이로다. 손바닥을 뒤집기도 하고 엎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산하대지가 어디 있느냐?”고 호령하는 법문은 석가여래가 8만 대장경을 설한 뒤에 한 번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신 법문과 조금도 손색이 없는 법문입니다. 그러므로 ‘냥아 스님의 경지는 석가모니여래보다도 떨어지지 아니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설명하면 알음알이에 떨어집니다. 의식에 떨어져 의식으로 해결되면 참선과 거리가 머니까 내가 착어를 붙이겠습니다. 

산호로 만든 베개 위에 두 줄기 눈물
반은 그대를 생각하고 반은 그대를 원망하는 도다.

이것은 옛말로 연시(戀詩)라고 할 수 있고 요샛말로는 연애 시라고나 할 수 있는데, 선에서는 이러한 글을 많이 인용합니다. 선의 깊은 경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이 글을 보고 참선을 하는 사람도 고목이나 찬 바위와 같이 그런 것이 아니라 감정이 활발히 살아 있다고 보는데, 이것은 그런 경지가 아니고 다른 깊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산호 베개 위의 두 줄기 눈물 
반은 그대를 사모하고 
반은 그대를 원망하는 도다.
어떤 경지입니까?

“할(喝)!”

 

*이 글은 당시 전 조계종 종정이었던 서옹 스님이 1984년 8월 11일 서울 수국사에서 했던 법문의 요지로, 1985년 9월호(통권 131호)에 실렸습니다. 
일부 문장은 현대적인 문법으로 교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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