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탐방] 찬불가 운동의 선구자 운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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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 탐방] 찬불가 운동의 선구자 운문 스님
  • 사기순
  • 승인 2007.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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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을 놓아 버렸을 때 그대로 부처님의 경지가 드러납니다.

1928년 전남 장성 출생. 1944년 경기도 양주군 망월사에서 인곡 대화상을 은사로 득도 하였으며 고암 대종사를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였다. 해인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수료 하였으며 범어사에서 수선안거를 성취한 이래 33하를 성만하였다. 인곡 스님으로부터 "석일 운문병(昔日雲門餠) 분부금일운문자(分付今日雲門子) 군봉일발고조병(君奉一鉢古祖餠) 제접 무진중생류(提接無盡衆生類)"라는 전법게를 받았다. 여수 흥국사, 진주 연화사, 대구 대안사 주지, 조계종 감찰위원, 조계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제3세대 불교음악동인 고문, 삼각 산 운문사 주지로 있다 1961년 서울 연화어린이회 창립을 시작으로 보리수 어린이회 창립, 불교소년교화연합회 창립, 만다라 불교학생회 창립 등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에 전력을 기울 였다. 한편 <불교동요집>(1964년)과 <불교의 생활>(1970년), <행복의 문>(1979년), <불교 성가집>(1983년), <어린이 찬불가>(1985년) 등을 펴냈다. 300여곡의 찬불가 운동을 펼쳐 어 린이 청소년 포교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조계종 총무원장 공로상, 제1회 포교대상, 불 교아동문학상, 서울특별시장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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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갓 돌 지난 아기도 노래만 나오면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좋아하는 것만 보더라도 아 름다운 노래가 인간 심성에 미치는 영향은 사뭇 크다. 또한 대다수 종교에서 신도들을 계 도하는 데 노래가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 나 라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급성장을 한 타 종교의 경우 일반인들도 읊조릴 만큼 보급된 찬송가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 불교는 어떤가. 경전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기 전에 하늘음악이 울리고 꽃 비가 내리는 것만 보더라도 음악은 부처님 당시부터 중요하게 여겨졌건만 찬불가는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불자들에게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선각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요즘에 는 찬불가 공연회도 잦아질 만큼 장족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
불교문화 발전의 기폭제라고도 할 수 있는 찬불가의 발전을 기원하면서 60년대 찬불가운동 을 주도한 운문 스님을 찾아뵈었다. 마치 이야기 할아버지 같은 운문 스님, 삼각산 운문사의 매미소리는 그날따라 유난히 크고 힘찼다.

스님, 뵙고 싶었습니다. 스님께서 지으신 찬불가를 평소에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남보다 먼저 노래를 만들어서 그렇기 그다지 신통한 게 없어요. 그리고 마음이 바빠서 너 무 많이 만들다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많아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불자들에게 제일 좋아하는 찬불가를 물으면 스님의 보현행원, 예불가 등을 손꼽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60년대면 찬불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을 때인데요.
찬불가를 짓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불교정화운동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겠지요. 불교정화운동 직전 해인사 강원과 선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정화운동이 한창이니 힘을 보태야 한다는 윤고암 큰스님의 말씀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서 합류했고, 당시 조계종 감찰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지요. 불교 정화 후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뒤 스님네들마다 인연 있는 고장으로 가서 포교하라는 종책이 시달되었고, 나는 목포의 자그마한 사찰로 내려갔어요.
정화불사 때 뼈저리게 느낀 것이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일이 잘 풀릴 것도 우리가 힘이 없어서 비비 꼬이는 경우를 자주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래 동네아이들을 모아 서 법회를 보았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애들과 함께 있다 보니까 법문만 가지고는 안되겠더 군요. 자연스레 불교설화에 관심을 갖게 되고 또 어린이 포교에는 무엇보다도 노래가 필수 적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가사를 만들어서 아이들 학교 교가에다 넣어서 불러보기도 하고, 학교 음악선생님과 머리를 맞대고 곡을 붙이기도 했지요."

무엇이 먼저인가 나중인가 가리기는 어렵겠지만 우선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어른들 포 교보다 어린이포교에 힘쓰신 까닭이 있으십니까?
"가만히 지켜보니까 신도들이 절에 오기 전에 먼저 점쟁이집에 갔다가 오는 겁니다. 점쟁이 한테 이것저것 묻고는 점쟁이가 일러준 대로 절에 와서 단지 축원만 해주고 불공만 해달라 는 신도들, 점좀 봐달라는 신도들을 보고 참으로 만감이 교차되었습니다. 기복신앙에 절어 있는 신도들을 부처님의 말씀대로 교육시키는 것은 힘겹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평생 젖어 있는 습을 하루 아침에 고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 일단 어른들은 점차적으로 교화하고, 갓난아기가 30살이 될 때는 뭔가 달라질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30년 목표를 세웠지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어린이들에게 부처님 말씀 을 전하려다 보니 자연 노래도 만들고 율동도 만들고 그런 것입니다. 노래만큼은 아이들에 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매개체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그렇지만 항상 선구자는 외롭고도 고달픈 여정의 연속이 아닐까 싶은데요.
힘든 일은 없으셨는지요.
"내가 찬불가를 지었다기보다는 경전과 조사스님 게송을 각색했다고 해야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작고하신 추월성 선생님을 만나 둘이 함께 먹고 자면서 나는 가사를 쓰고 추선생님 은 작곡을 하는 나날이 거듭되었지요. 그 때는 힘든 줄도 모르고 했어요. 수행은 안 하고 찬 불가에만 미쳐 산다고 말들이 많었지요.
신도들도 못미더워했어요. 스님이 절살림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허구헌날 작곡가 선생하고 노래만 만들고, 아이들을 모아놓고 시끄럽게 군다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들이 태반이었지 요. 허기사 남 안 하는 짓을 하니까. 일테면 찬불가 만드느라고 절재산을 축낸다는 불평불 만을 노골적으로 털어놓기도 했지요. 그 뒤 해인사에서 교무를 살 때도 추선생님을 모시고 가서 생활비를 대가면서 찬불가를 만들었지요."

첫 작품이 64년도에 내놓으신 불교동요집이죠?
"그 전에 수첩만하게 불교성전 제 1집을 만들어서 부록으로 찬불가를 수록했었습니다. 사실 한때 너무 힘들어서 찬불가에서 손을 떼려 했는데 김해포교당에서 아이들이 내가 만든 찬불 가를 부르며 절마당에서 노는 것을 보고 힘을 얻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찬불가에 매달려 살았지요.
<불교동요집>은 두 번째로 서울에서 만든 것인데, 3,000권을 인쇄하면서 조계사 신도만 해 도 3,000명은 넘으니 충분히 소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는데 몇 권 안 나가는 겁니다.
할 수 없이 전국의 아는 절마다 배분해서 보내면서 편지를 보냈지요. 그랬더니 단 2군데에 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만큼은 시주를 하겠지만 다시는 그런 책 보내지 말라는 글월과 함 께. 나머지 책은 다 공중에 떠버린 거지요. 그 때 얼마나 실망스러웠던지... "

은사스님과 매우 각별한 인연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 매우 어린 나이에 출가하 신지라 더욱 그러하셨을 듯 싶습니다.
"속가의 친 형님이 어느 날 불현듯 누더기를 걸치고 돌아오셨어요. 처음에는 낯설어서 형님 곁에 가지 않을 정도였는데 며칠 묵으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해주시는데 그만 마음을 뺏 겨버렸어요. 아마도 목련존자와 그 어머니인 청제부인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왜 그 렇게 마음에 끌리든지 어린 마음에도 '우리 형님처럼 스님이 되면 훌륭한 사람이 되겠구나' 생각하고 출가하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동네 조그만 절에 가서 행자생활하다가 망월사로 스님의 명성을 듣고 무작정 찾아 갔지요. 우리 스님은 경선강(經禪講)에 두루 탁월했던 당대의 고승이셨습니다. 또 워낙 무소 유정신이 투철하신 분인지라 당신 소유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하나라도 생기면 늘 누 군가에게 주고는 항상 빈털터리 선객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상 내시는 법이 전혀 없으셨고 심지어 일꾼들 옷까지 빨아주시고 공부하는 선객들의 짚신은 우리 스님이 도맡아 놓고 삼아 주실 정도로 자애로운 분이셨어요. 그런 스님이 처음에는 '딴 스님은 밭도 주고 논도 주고 돈도 줄 것이니 가라' 고 하시며 가라고 하셨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스님을 따를 것입니 다.'하면 '그래 그런 재산보다 무자답(無字畓)이 더 훌륭하니라'고 하시면서 공부에 열중할 것을 당부하시곤 했습니다.
또 언젠가 선방에 있다가 스님을 찾아뵈었더니 하시는 말씀이 '늘 깎은 머리를 만져보거라' 하셨지요. 언제 어느 때나 승려라는 신분을 잊지 말고 공부에 힘쓰라는 깊으신 뜻이 함축되 어 있는 그 말씀이시지요. 이는 제 평생의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찬불가 때문에 은사스님의 뜻을 처음으로 거역했다는 말이 들리던데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제가 불효를 했어요. 스님께서 방생하신다고 그때 돈 3만원을 맡기신 적이 있 었지요. 그래 방생하는 거나 찬불가 만들어서 불교 홍포에 힘쓰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 하고 그 돈을 찬불가 만다는 데 다 써버렸어요. 그 때는 스님께서 꾸중을 하셔도 잘못했다 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스님께서 찬불가보다는 참선과 염불에 힘쓰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 뜻도 거역할 수밖에 없었 지요. 그 당시 심정으로는 부처님께서 말리셨어도 찬불가 만드는 일을 그만 둘 수 없었을 겁니다. 정말 남들 말마따나 단단히 찬불가에 미쳐 있었던 게지요."

스님, 찬불가를 만드시면서 보람있는 일도 많으셨을 듯싶은데요.
"보람이야 아이들이 즐겁게 찬불가 부르면서 노는 것만 봐도 기쁘지요. 어려운 여건에서도 수없이 많은 곡을 작곡해주신 추월성 선생님을 비롯하여 정인섭 선생님, 이찬호 선생님께 고맙고, 하모니카 할아버지 이해성 선생님께도 말할 수 없이 감사를 그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름을 알 수 없는 보살님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군요. 살아계실는지... .
조계사에서 어린이법회를 지도할땐데 오르간이 없어서 아이들에게 찬불가를 가르치는 게 여 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어떤 신도님 댁에 오르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빌려달라고 했더니 그 신도님 말씀이 '스님이 하시는 어린이법회, 어린이 합창단에 뭔가 도울 방법이 없나 마 음을 쓰고 있었는데 오히려 감사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큰 힘 이 되었지요. 또 그해 겨울에 강당에 난로가 없어서 덜덜 떨면서 법회를 볼 때였습니다. 그 보살님께서 난로를 사주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늘상 손에 끼고 다니시던 반지를 팔아 난 로를 사주셨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끼는 물건을 아낌없이 보시하는 그 마음이 바로 보살의 마음일 것입니다.

얼마 전 작고하신 안병호 선생님과도 친분이 두터우셨지요? 안 선생님 장례식에서 추도법어 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친분 정도가 아니지요. 안 선생님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였습니다. 조계사에서 개운사로 옮 겨서 법회를 볼 때 처음 죄었고(1964년), 불교소년교화연합회(사단법인 대한불교청소년교화 연합회 전신)를 함께 창설해서 줄곧 포교운동을 벌였습니다. 둘이 손을 맞잡고 서울에 적어 도 20군데의 어린이법회를 만들자고 약속하였는데 그에 조금 못미쳐 15군데 정도 만들었습 니다.
그분이야말로 보살의 후신입니다. 자기 돈 써가면서 어린이, 청소년 교화에 교도소 재소자 교화에 그분만큼 부처님 뜻을 올곧게 좇은 분도 드물것입니다.

스님의 모든 활동의 근원적인 힘은 아무래도 그간의 수행력에 있을 듯싶은데 해인사 강원과 선방에서 지내실 적의 얘기를 해주십시오.
"효봉 스님께서 당시 해인사 조실로 계셨는데 스님께 사집을 배울 때가 지금도 기억에 새롭 습니다. 한 줄 두 줄 새겨가면서 그 뜻을 음미하는 기쁨은 찬불가집이 처음 세상에 태어났 을 때의 기쁨에 비견될 만합니다.
해인사 살 때 갖가지 추억거리가 많지요. 한여름에 갑자기 부목이 나가버리는 바람에 부목 방에 가서 거처하면서 장작을 쪼개서 각 방에 불을 넣어주기도 하고 새벽에 대중스님들 몰 래 국수 말아서 먹어치운 일도 생각나는군요.
깨쳐야 되는데 하루라도 빨리 공부를 마치고 싶은 욕심은 하늘을 찌르는데 공부의 진전은 없고 어찌나 답답한지 붓에 먹을 듬뿍 적셔서 <금강경오가해>에 흩뿌리기도 하고, 도끼로 방바닥을 내리 찍기도 하고... .
사실 따로이 깨칠 것도 없는데 젊은 날에 참 방황도 많이 했지요."

수십년 동안 수행하고 포교하시면서 느끼신 점이랄까, 후학들에게 들려주실 말씀이 있으시 다면?
"글세 내가 나이 먹었다는 생각, 수자상을 떨쳐버려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뭐 든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부지런히 용맹정진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아무것도 없어도 의 욕 하나만으로도 일이 됐는데 늙어서는 자꾸 주춤해져요. 요즘에는 젊은 분들이 찬불가 작 사.작곡이며 포교에 힘쓰는 분들도 많고, 종단에서도 늦은 감은 있지만 포교에 관심을 기울 이는 양상인지라 안심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어요. 포교가 곧 수행이라는 생 각으로 재가자건 출가자건 모두가 포교에 임해야 합니다."

스님, 끝으로 불자들에게 한말씀 해주십시오.
"이제 나이 먹어 날마다 하는 일 없이 놀고 앉아 있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방하착(放下着,내려 놓으라, 그만 잊어버려라, 쉬라는 뜻)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뭔가를 얻으려고 하고 깨치려고 하며 집착하는데 그것을 다 놓아버리면 본래가 밝 고 성성한 자리가 보입니다.
뭔가 얻으려고 하는 순간, 집착하는 순간 마음속의 번뇌망상이 얽히고 설켜 중생의 마음자 리가 되는 거예요. 욕심을 다 놓아버렸을 때 부처님의 경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 일체 중생이 이미 성불해있다고 원각경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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