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두려웠던 아이, 타인 죽음 곁에서 눈물 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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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두려웠던 아이, 타인 죽음 곁에서 눈물 닦다
  • 박현
  • 승인 2020.05.28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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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나는 죽음을 참 많이도 두려워했다. 명절이나 할아버지 생신 때, 아버지를 따라 기차와 배, 버스를 오르내리며 큰댁에 가야 했다. 좀 더 쉬운 길도 있건만 아버지께서는 왜 그렇게 복잡한 길을 택했을까. 굳이 헤아려 보자면 강가에 자리 잡은 가게에서 가까운 사람들이랑 장어에 곁들여 마시는 막걸리 한잔의 즐거움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그렇게 술을 마셨고 사람과의 만남을 탐했다. 큰댁에 도착하면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은 웃고 이야기하고, 노래 부르며 밤을 새웠다. 어린 나는 이불 속에 누워 가물가물 잠으로 빠져들면서도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 생사 고민이 이끈 호스피스

‘내일 강을 건너다 배가 뒤집히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저 사람들은 뭐가 저리도 좋을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따라 길을 나섰고, 그렇게 걱정 속에서 해는 지고 날은 새고, 새해가 오고, 또 한 해가 갔다. 희한하게도 그렇게도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아버지와 함께 가는 그 길을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술과 만남을 탐하며 즐기시던 아버지의 삶에도 늘 죽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이 지면에서는 풀어낼 수 없으나-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 삶의 숙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보다는 책 읽고 사색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은 물리학을 전공한다는 나에게 어쩌다 그런 길로 가게 되었느냐고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던 내가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됐다. 언어장애를 가진 아이가 터널을 통과 못 하기에 안타까워서 계속해보기를 권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선생님이 한 달 내로 통과시켜보라 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노력했지만 아무도 하지 못했다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가 직접 터널에 들어가서 반대쪽 끝에 서 있던 아이에게 들어오라 했다. 그것은 생각이 끊어진 자리였다. 아이는 잠깐 망설이더니 들어왔고, 통과했다.

난 아직도 터널을 통과하고 나서 보였던 그 아이의 맑은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나로 설 수 있는, 붓다의 제자로서 자리이타적 삶을 살고자 하는 내가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그렇게 깨어나 버린 또 다른 나는 학교에 앉아있는 것이 힘들어졌다.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또다시 누군가의 얼굴에 그런 맑은 표정이 깃들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의 어리석음으로 몰랐을 뿐, 내가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이미 삶은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생사에 대한 고민은 결국 나를 아미타 호스피스 교육장으로 이끌었다. 물리를 가르치던 내가 자아초월상담으로 전공을 전환하고, 호스피스 과목을 강의해야 할 상황에 맞닥뜨리고서야 도리 없이 가게 되었다. 우연히 알게 된 ‘정토마을’ 홈페이지를 수년간 들락거리기만 했는데, 인연은 미적거리기만 하는 나를 결국 그곳에 앉혔다.

7박 8일 호스피스교육과 5일간의 임상실습. 승가와 도반이 함께 한 도량 안에서 부처님의 법을 듣는 시간 내내, 내 마음 안에서 출렁이는 물결은 가슴에서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던 마른 낙엽을 촉촉이 적셨다. 삶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던 나는, 그곳에서 숨 가쁘게 내 삶의 변곡점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매일 108배를 하며 부처님과 불법 안에서 깊이 있는 자신과 만났고, 열정과 희열 속에서 발을 땅에 딛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것처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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