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불교 개론] 번뇌를 지혜롭게 대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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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불교 개론] 번뇌를 지혜롭게 대하는 법
  • 장휘옥, 김사업
  • 승인 2019.12.03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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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각자의 내면에는 컴퓨터가 한 대 있습니다. 이 컴퓨터는 멈추는 일이 없이 늘 작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뭔가를 말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나의 내면에 있는 이 컴퓨터에 그대로 저장됩니다. 예를 들어 얼굴로 짜증을 내거나 짜증 섞인 말이나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은 틈을 두지 않고 모두 이 컴퓨터에 입력되어 저장되는 것입니다. 적당한 상황이 도래하면, 이 컴퓨터는 입력되어 있던 짜증을 나의 행동이나 말과 생각으로 다시 토해 냅니다. 짜증을 토해 내지 말라고 해도 이 컴퓨터는 저장된 짜증이 있고 짜증 낼 상황만 갖추어지면 아랑곳없이 짜증을 발산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짜증을 내고 싶지 않은데도 불쑥 짜증을 내고 맙니다. 지금 이 컴퓨터에 의해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남이 보든 말든, 자신이 의식하든 못 하든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다. 포도는 포도씨를 남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모든 행위는 그냥 사라지지 않고 나의 내면에 그 씨앗을 남긴다. 착한 행위는 착한 씨앗을, 악한 행위는 악한 씨앗을 남긴다. 거짓말을 하는 순간 그 씨앗은 나의 내면에 남는다. 한 번 거짓말하면 하나의 거짓말 씨앗이, 한 번 더 하면 또 하나의 씨앗이 추가된다. 이 글에서 ‘행위’라는 용어는 신체적 행동·말·생각을 포괄하는 뜻으로 사용한다. 즉 신·구·의 3업을 총칭한다. 반면 ‘행동’이라는 용어는 신체적 행동, 즉 신업(身業)만 가리킨다는 것을 유의해 주기 바란다. 포도가 남긴 씨앗에 적당한 온도나 양분 등의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싹이 트고 포도가 열린다. 마찬가지로 착한 행위가 남긴 씨앗에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나는 또다시 착한 행위를 하거나 좋은 과보를 받는다. 또한 악한 행위가 남긴 씨앗에 적당한 조건이 도래하면 나는 다시 악한 행위를 할 수 있고 괴로운 과보를 받는다.
우울할 때 담배를 한 대 피웠더니 기분이 나아졌다. 이 과정에서 일어났던 모든 행동과 느낌과 생각이 씨앗으로 남았다. 또다시 우울한 기분이 들면 나는 곧 담배를 찾게 된다. 우울한 기분이라는 조건이 형성되자 이전에 같은 상황에서 흡연하고서 남겨졌던 씨앗이 즉각 담배를 찾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담배를 서너 개비 연달아 피웠다면 그만큼의 씨앗이 또 남는다. 흡연의 씨앗이 이렇게 자꾸 쌓이다가 때가 되면 건강 악화라는 과보를 가져오게 된다. 행위는 씨앗을 어디에 남길까? 그 씨앗은 사후에도 남아서 보존될까, 씨앗의 소멸은 불가능한 것일까? 씨앗이 소멸되고 나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해 세밀히 밝히고 있는 것이 대승불교의 유식(唯識)사상이다. 물론 이 부분은 유식사상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 부분에서 유식을 능가할 사상은 없을 것 같다. 유식사상은 공(空)사상과 함께 대승불교의 양대 핵심 교리다. 화엄, 천태, 밀교 등 다양한 대승불교 사상은 공과 유식을 두 기둥으로 삼아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도의 고승들은 깊은 삼매의 체험을 바탕으로 연기와 공을 새로운 각도에서 고찰하여, 사상과 실천 양면을 아우르는 뛰어난 대승적 체계를 완성했다. 이 체계가 바로 유식이다. 유식은 인도를 넘어 아시아 전체의 정신문화에 실로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신라 시대의 유명한 원효(617~686) 대사가 두 번에 걸쳐 중국으로 유학 가려 했던 것도 바로 이 유식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행위가 남기는 씨앗을 유식은 ‘종자’라고 부른다. 이 종자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마음에 남겨져 보존된다. 남겨진 종자는 견도(見道)라는 수행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소멸되지 않는다. 따라서 높은 수행단계에 이르지 않는 한, 아뢰야식에 남겨진 종자는 사후에도 소멸하지 않는다.
우리 개개인의 마음은 8가지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근본을 이루는 마음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마음을 불교에서는 ‘식(識)’이라고도 부른다. 아뢰야식은 우리 마음의 뿌리에 해당하며 일종의 무의식에 가깝다. 땅속에 있는 뿌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듯이, 아뢰야식은 그것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 깊은 곳에서 미세하게 작용한다. 아뢰야식은 한순간도 멈추는 일 없이 늘 활동한다. 아뢰야식에서 ‘아뢰야’란 산스끄리뜨 ‘알라야(ālaya)’를 발음 그대로 한자로 옮긴 음역어이다. 알라야에는 곳간, 집착 등의 의미가 있다. 세계 최고봉들이 즐비한 히말라야산맥, ‘히말라야’는 ‘히마(hima)’와 ‘알라야’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된 합성어다. 여기서 히마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雪)’, 알라야는 ‘곳간’을 의미하므로, 히말라야는 ‘눈의 곳간’, ‘눈이 쌓여 있는 곳’을 뜻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히말라야를 설산(雪山)이라고 불렀다. 일년 내내 눈을 머리에 인 산들이 늘어서 있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뢰야식은 행위가 남기는 종자를 하나도 유실됨이 없이 저장하고 보존하는, 곳간과 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곳간이란 의미를 갖는 아뢰야를 자신의 이름으로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뢰야식이 종자를 보존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아뢰야식은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을 하고, 윤회의 주체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는 종자 보존과 관련된 아뢰 야식의 측면만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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