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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창간 45주년, 다시 보는 월간 「불광」 | 다시 듣는 큰스님 말씀 1 광덕 스님

광덕 스님

1927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 1950년대 범어사에서 당대의 대선지식인 동산(東山) 스님을 만나 참선을 시작, 위법망구(爲法亡軀)의 구도 정신으로 수행정진했다. 1974년 9월 불광회(佛光會)를 창립하고, 같은 해 11월 월간 「불광」 창간, 불교의식문 한글화, 경전 번역, 찬불가 작시, 불광사 대중법회 등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인의 품으로 돌려주며 대중을 일깨웠다. 불교의 생활화·현대화·대중화로 한국불교의 새로운 역사를 쓰며 우리 시대의 보현보살로 존경받았다. 지금까지도 스님의 말씀은 끊이지 않는 샘물처럼 오늘 우리의 행복을 창조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가?

오늘날 과학의 발달은 우리에게 많은 편리와 풍요를 제공하고 가히 고도 문명을 자긍하게 한다. 그렇다고 인류 세계가 반드시 전도양양하다고 낙관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식자 간에는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많은 우려와 함께 부정적 견해의 입장에 서는 이가 적지 않다. 자원고갈, 환경 파괴, 인구 폭발, 전쟁 등을 그 주된 이유로 든다. 그것만이 아니다. 미래는 차치하고라도 지금 당장 풍요 속의 인간이 그만큼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도덕적 타락, 공허한 인간상, 퇴폐 만연, 방황하는 지성, 그 모두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필자는 인간의 미래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입장에 선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도덕적 퇴락, 인간 비속화 긍정, 물질 가치 치중, 물질과 기계와 돈과 조직사회 속에 종속된 인간 아닌 양상, 그 속
에서 자주와 창조와 생의 환희를 잃어가는 인간 표정에 대하여 심한 우려를 금할 길 없다.


“ 정신이 공허한 안락과 풍요는 즉시 물질과 영합한다. 그리하여 감각적 향락의 추구로 생의 의의를 찾으려 한다.”


무엇이 생의 토양을 황폐하게 하는가? 세 가지 입장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물질 위주의 가치관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은 우리 사회를 거대한 산업 사회로 바뀌게 했다. 인간은 누구나 산업 질서 속의 인간이 돼 버렸다. 여기서는 오직 적응과 능률과 생산성만이 가치의 척도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성과 자유와 도덕성이라는 것도 생산성의 척도에서 평가되고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생산형으로 정형화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비극이 있다. 무한의 창조자인 인간이 그의 성능을 위축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형상에의 집착이다. 인간의 인식은 커다란 제약하의 것. 시간, 공간의범주로 한정된다. 엄밀히 말하면 한정이 아니라 변질되어 인식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의 인식이 일정한 범주 안에 한정된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실상의 여실한 파악이 아닌 변질된 인식이라는 사실에는 등한하다. 사실 우리는 진리의 원상, 즉 참된 현실(현존)은 인식 못 하고 있다. 이를테면 가상(현상)만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가상은 실상이 아니며 현상은 진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전(經)에는 ‘일체 현상은 몽환과 같고 포말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하여 그 현존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물질적인 것, 형상적인 것만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볼 수 있는 것, 보일 수 있는 것, 인식적인 것 밖에는 없는 것으로 확신한다. 그 가시 범위가 부단히 깨어지며 확대되는 데도이 확신은 변하지 않는다. 만일 가시적인 것 밖에 또다시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당장 미신으로 몰아세운다. 이야말로 엄청난 미신이다. 현상은 허가(虛假)요, 실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존인가. 겸허하게 찾아드는 것이 구도자의 자세
요, 진리행자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헌데도 그와는 반대다. 현상적인 것, 인식적인 것, 외에는 모두 배격되고 존재가 부정된다. 이러니 어찌 현상을 넘어선 진상을 파악할 것이며 보다 인간적인, 보다 도덕적인 진리 현장에 도달할 것인가?
셋째로는 외향적인 감각 추구를 들겠다. 안락과 풍요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 결코 고난예찬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안락과 풍요를 오용함으로써 우리의 인간성이 황폐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공허한 안락과 풍요는 즉시 물질과 영합한다. 그리하여 감각적 향락의 추구로 생의 의의를 찾으려 한다. 여기서 인간은 정신의 왕좌에서 타락의 구렁으로 추방된다. 아름다운 소리, 자극적인 맛, 부드러운 촉감, 황홀한 향기, 환상적인 형상, 화려한 빛깔…. 이 모두가 인간 감성을 내면 지향에서 외면 지향으로 구동하게 한다. 여기서 인간은 자기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고요와 깊이와는 멀어진다. 그래서 자극과 변화로 자기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황량한 인간이 등장
하게 된다.

 

“행복이란 ‘생명의 안전감’이다.
생명이 제자리를 얻었을 때 오는 감정이다.”

 

사람이란 별다른 욕망이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현실적인 고통의 회피와 안녕을 바란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희망과 안락과 개성의 발휘 등 이른바 행복의 추구로 발전한다. 오늘날 문물의 발달도 역시 행복 추구가 가져온 바다. 그 결과가 어떠한가. 과연 소망대로 행복한가. 외계의 정복, 물량의 획득, 새로운 물질의 생산, 풍요 등 결코 그것만으로는 행복하지 않음을 보아왔다. 물질의 대량 소비, 관능의 충족, 물질의 지상 가치, 이러한 풍조가 지배하는 사회와 제도 속에서 생명의 윤택은커녕 도리어 메말라감을 보아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무도덕’과 ‘광란’은 실로 그 근원이 깊은 곳에 있음을 본다. 생명의 혼이 서야 할 땅을 잃고 ‘나의 땅을 달라’고 절규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여기에는 애절한 생명의 목소리가 숨겨 있다. 대개 행복이란 ‘생명의 안전감’이다. 생명이 제자리를 얻었을 때 오는 감정이다. 그것은 욕망의 대량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고통에서는 안락을, 결핍에서는 충족을, 억압에서는 자유를, 구속에서는 파괴를, 혼란에서는 질서를, 불안에서는 평화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그를 통하여 존재의 독자성과 주체성과 자율성과 창조성과 원만 구족성을 실현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절대의 무한과 자제에로 향상을 기도하는 것이다. 이곳이 생명의 나라이며 인간 혼의 주처인 까닭이다. 행복도 여기에 이르면 마지막이다.

“행복의 주체, 그것은 불성(佛性)또는 영성(靈性)이라 할 절대 생명이다.”
 

여기에서 말해 둘 것이 있다. 행복 조건을 누리는, 행복의 주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불성(佛性) 또는 영성(靈性)이라 할 절대 생명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영원과 자재 무한과 원만을 근본 속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경전에는 현상 인간을 분석하면서 육체, 감각, 의식, 가치, 정신 등 겹겹으로 쌓인 인간 내부에는 불성이 안주하여 이 불성이 모든 존재와 행복과 성공덕(聖功德)의 근원임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불성 이외에는 모두 버리라 했고 실로는 없는것이라 했다. 그러나 현상에 눈이 고착된 우리들에게는 불성과 성공덕 밖에는 없는 것이라는 말씀에 대하여, 곧잘 현상은 있고 현상 그 너머에 영성이 있다거니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흔히들 육체의 배후에는 잠재의식이, 그 배후 깊이에는 우주 의식이, 그리고 불가사의한 초의식이 존재한다고 한다. 어떻든 인간을 단순한 육체이거나 물질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단순한 물질시하거나, 물질지상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여건하에서 인간 생명은 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1974년 12월호, ‘인간승리를 위한 서장’ 발췌·정리

글.
광덕 스님

양민호  bulkwang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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