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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구도자의 길을 오롯이 걸은 분,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다 성철 스님 상좌 원택 스님 인터뷰특집 | 창간 45주년, 다시 보는 월간 「불광」 | 제자, 스승을 말하다 2

 

중은 혼자 사는 사람이니 스스로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손수 누더기 승복을 기워입던 스님. 나서서 자랑하지 말고 쓸모없는 인간이 돼야 비로소 깨침의 공부로 갈 수 있다며 백련암에 대통령이 찾아와도 내려가지 않았던 스님. ‘가야산 호랑이’로 불린 고독한 구도자 성철 스님의 상좌 원택 스님을 만나 성철 스님과의 일화, 가르침에 대해 들어봤다.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견을 청했다.

Q ─ 성철 스님과 처음 사제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우연히 친구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갔습니다. 성철 스님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좌우명 하나 주시면 평생 기억하고 열심히 지키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스님이 “세상에 공짜가 있나?”라고 하시며 “절돈 3천 원을 내라”고 하십니다. 절 3천 배였죠. 좌우명 하나인 1계를 주시며 절돈 3천 원은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라고 말씀드리자 “넌 불교 좀 아는 모양이지? 만 원 내놔라” 하시더군요. 3천 배 깎으려다 1만 배를 하게 됐죠.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었습니다. 1만 배는 못했지만 온 힘을 다해 스님이 오실 때까지 절을 했어요. 스님이 주신 좌우명은 “속이지 마라!”였어요. 크게 실망했습니다. 속이지 말란 건 어른들이 늘 하시던 말이니까요. 백련암을 떠난 후 몇 달이 지났는데 별안간 스님이 말씀하신 “속이지 마라”가 머리를 울리더라고요. 남을 속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말이 아닐까? 혼자서 다시 찾아갔는데 성철 스님이 마당을 포행(布行)하고 계셨죠. 반겨주시리라 생각하고 달려가니 “웬 놈이냐! 난 모른다, 옛날 일 몰라!” 고함을 치셨습니다. “스님, 제가 다른 공부보다 화두 배워서 참선하고 싶어서 뵈러 왔습니다”라고 하니 갑자기 쌀쌀맞던 스님이 화색을 보이셨습니다.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시고 의문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하시며 문호를 개방해주셨어요. 이후 새해가 되어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스님께서 “밤도 늦었는데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하셔서 자고 일어났더니 다음 날 “몇 살이고?” 물으십니다. 스물아홉이라 말씀드리니 “서른 다 됐네, 인생 다 살았어. 서른인데 뭣 할래? 세상살이 그만하고 출가해라. 부처님 말씀을 따라 깨달음을 얻는 길을 가면 그 또한 큰일이다. 내가 아무나 중 되라고 하지 않는다”라며 출가를 권유하셨습니다. 전혀 생각해 본 적 없었다고 말씀드리니 하룻밤 더 자고 가라고 하십니다. 스님 말씀을 되새기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내가 공부해 출세한들 얼마나 할까’, ‘함부로 중되라고 안 한다고 하시니 내가 스님 소질이 있나’ 점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출가를 결심했고 성철 스님과 사제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Q ─ 출가 후 성철스님과의 일화 중 기억나는 게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도시 생활을 하다가 산속 절에 들어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밥을 짓는 일도 밭일도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야단을 많이 맞았어요. 공양주가 되었을 때 쌀을 열심히 고른다고 골랐는데도 종종 사형들이 밥을 먹다 돌이 씹히는 소리가 나면 가슴이 내려앉곤 했습니다. 어느 노장님이 백련암에 오셔서 공양을 드렸는데, 얼마 후 호통을 치셨습니다. “공양주 누구야!” 앞에 가니 “이놈아, 내 이빨 돌려내!” 돌 섞인 밥을 패대기치셨는데 쌀알이 얼굴에 튀어 올랐습니다. 눈물과 콧물이 줄줄흘렀습니다. 시름에 잠겨 스님 될 역량이 부족하다고 자책했습니다. 밤에 큰스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저는 하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그래? 그럼 내 이빨은 어쩔래? 내 이빨도 많이 물어 놓아야 하는데”라고 하십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늘 맨 위 밥만 담았고 한 번도 야단이 없으셔서 돌을 씹으셨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그저 열심히 돌 없는 밥을 지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Q ─ 성철 스님의 가르침은 무엇이며, 현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즉심즉불(卽心卽佛)”, “마음이 부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깨치는 것이 선을 닦아가는 기본이라며 원칙을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스님의 길은 외로운 길이며 단체로 모여서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든 혼자서 이뤄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공동학습이 아니라 혼자 공부해서 득도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스스로 밥할 줄 알고, 반찬도 만들고, 옷도 기우고, 장작도 패며 기본 생활기를 갖추어야 하고 거기서 비로소 도를 닦을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깨침의 공부로 가려면 세상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최잔고목(摧殘枯木),썩고 부러져 나무꾼도 거들떠보지 않는 쓸데없는 나무 막대기 같은 인간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잘났다는 자부심이 있으면 도가 트기 글렀다며 가진 재주로 세상에 아무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려 애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서고 싶고 남보다 낫다는 우월한 인식이 있는 한 큰 공부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는 겁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분골쇄신(粉骨碎身) 참선하여 깨치는 걸 으뜸으로 삼으라 하셨어요. 부처님에 대한 철저한 신심도 강조하셨지요. 누구나 백련암에 오면 3천 배를 해야 했으니까요.
이 모든 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Q ─ 성철 스님의 가르침은 불교계에서 어떻게 계승되고 있나요?

성철 스님께서 1981년 조계종 종정이 되시고 난 뒤 1982년 『선문정로』라는 책을 내셔서 보조국사의 돈오점수(頓悟漸修)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이론을 펼치며,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하셨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불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일로 이른바 ‘돈점논쟁’이 일어났어요. 성철 스님은 돈오점수를 연구하던 수많은 학자에게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돈오돈수를 말씀하신 스님도, 보조국사의 돈오점수를 주장하던 당대 최고의 1세대 학자들도 거의 돌아가시고 난 후 지금은 활발한 연구와 논쟁 자체가 많이 식어 버렸습니다. 백련암에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모두 큰스님들의 이론이니 잘 연구해 보급하는 데 힘을 모으자고 『백련 논서』라는 논설집을 냈었습니다. 현재는 15년 가까이 절판 상태입니다. 성철스님 호를 딴 ‘퇴옹 학회’를 설립해 성철 스님의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해나갈 계획입니다. 돈오돈수이든, 돈오점수이든 앞으로 선학을 발전시키는 데 서로 장점을 살려 공동연구도 많이 진행되길 바랍니다.

Q ─ 우리나라 불교가 신도 수 감소, 대중적 이미지 하락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요?

제가 여러 기자분을 만났을 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성철 스님 계실 때 새해 되면 각 종교 지도자 인터뷰가 전면에 배당이 되었었는데 왜 요즘엔 짤막하게 게재되거나 그마저도 나오지 않는경우가 많냐고요. 한 기자분이 성철 스님, 김수환 추기경님, 한경직 목사님 등 예전에 명망 있던 종교지도자들이 없고 종교 자체가 대중들에게서 많이 멀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왜 멀어지고 있는지 스님께서 반성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성철 스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사회를 탓하지 말고 스스로 왜 그런지 들여다보고, 반성하고, 잘못을 고쳐야 한다고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고 선언하신 후 아무도 뵐 수 없었는데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신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제도할 사람이니 들이라” 하셔서 하신 말씀은 바로 ‘팔정도’입니다. 성철 스님께서도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법문을 하셨어요. 부처님 말씀과 큰스님들의 좋은 법문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며 신심을 두텁게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 남형권 사진. 백련불교문화재단

남형권  nhkb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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