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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의 자전적 에세이] 불교미술 연구에 몰두, 첫 논문집 내다

오랜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며 경주박물관에서 서울의 국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귀국하여 보니 국립박물관의 분위기는 적막강산이었다. 생동감이 없이 고요했다. 정부청사가 과천으로 옮기자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이 비게 되었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에서 중앙청으로 이전하도록 결정되었는데 1년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아무도 이전 준비를 하지 않고 있어서 한병삼 관장께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했다. 1985년 여름에 즉시 준비가 시작되어 마치 전시 상황으로 돌입한 듯했다. 5층은 연구실로, 1층은 사무실로 삼았다. 전시 공간이 매우 넓어진데다가 고고학은 2층, 미술사학은 3·4층에 전시해야
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매우 많았다. 작품 선정, 패널 원고, 카드 작성, 진열실 재정비, 진열장 배치,도록 원고와 편집 등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전시 기획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 관심도 없을뿐더러 전공이 없는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원고 교정 볼 사람들도 몇 명 없었다. 박물관에서 전시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천신만고 끝에 이전 개관을 해놓고는 1986년에 미술부장이 되었으며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매년 중요한 논문을 지속적으로 써나갔다. 매년 한 편의 올바른 논문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각각의 논문에 몇 년의 기초 작업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저서를 중히 여기지만 실은 뛰어난 논문의 가치가 더 크다. 1987년 「석굴암 건축에 응용된 조화(調和)의 문(門)」이란 논문을 『미술자료 제38호』에 발표했다. 석굴암에 대한 본격적 연구의 신호탄이었다. 건축에서 비례의 개념은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간파하고 비례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불상 연구자는 건축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나는 15년 후 사찰 건축 공포(栱包)의 구성 요소와 상징 구조를 밝히면서 한국 건축에 눈 뜨기 시작했다. 그 후 동양을 넘어 서양 건축에도 눈 뜨게 되어 서양 학자들과 교유하며 아테네와 파리 등지에서 학회 발표도 하였다. 아마도 동양의 학자가 서양의 건축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서양 건축사에 큰 오류를 발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시대에 따라 비례의 전개가 달라지는데, 그작도 과정에서 처음 생기는 비례가 ‘1 : 루트2’다. 프랑스말로 이 비례를 ‘la porte d’harmonie’, 즉 ‘조화의 문’이라 부른다. 단지 그런 비례의 원리가 석굴암의 건축에 응용되었다는 것을 요네다 미요지가 밝혔지만 나는 그것을 더 깊이 연구하여 불교 사상과 연결 지었다. 조화(調和)란 사상적으로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으로 불교 사상에서는 원융(圓融)이라 부른다. 화엄 사상의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라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도 조화의 세계다.

1987년에 「통일신라 법당(法幢)의 복원적 고찰」을 『김원용 정년퇴임 기념 논총』에 발표했다. 법당이란 것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완전히 잊혀진,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적 조형 예술품이다. 사찰 입구에 높이 솟은 깃대를 세우고 맨 위에 용의 머리를 두고 도르래를 장치하여 긴 번(幡)을 휘날리게 함으로써 절 입구를 장엄했던 것이다. 전혀 전모를 모르다가 앞 회에 언급한 것처럼 영주 출토 금동 용두를 보고 복원을 시도해 본 것이다. 그러나 어떤 번을 걸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통일신라 시대에 사찰 입구에는 법당이 서 있었으나, 지금은 지주 둘만이 서 있을 뿐이다.

1987년 「경주남산론」을 『경주 남산』(강운구 사진집)에 실었다. 경주 남산의 석불을 전체적으로 다룬 최초의 논문이다. 공저 성격을 띤 책으로, 살펴보니 실려야 할 석불 사진들이 많아 이를 보완하고 내 논문도 실었다. 경주 남산은 의외로 넓고 깊어서 경주에 살지 않고는 전체 유적을 답사하기 어렵다. 계절마다 시간에 따라 태양이 조명하는 석불의 얼굴 모습도 다르고 옷 주름도 다르다. 서울에 살면서 가끔 와서는 남산의 유적을 올바로 체험할 수 없다. 신라 경주의 유적이나 작품을 완벽히 체험하려면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 신라 1,000년 수도 경주에서 오래 살면서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을 함께 체험했으므로 백제 지역에 가서 작품들을 보면 삼국 간의 문화적 특성과 차이를 확연히 파악할 수 있었다.

경주 남산은 하루에 한 계곡밖에 오르지 못한다. 서라벌 중심에 자리 잡은 거대한 남산은 계곡마다 석불을 만들어 세우거나 바위에 조각한 마애불이 매우 많아 자연과 조형 예술 작품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특히 바위는 만물생성의 근원이라는 것을 훗날 민화(民畵)에서 분명히 깨쳤으나, 이미 경주 남산 바위에서 불상들이 현신하는 모습을 수없이 체험했다. 바위는 예부터 예배의 대상이었는데 바로 그 바위에 여래를 새겨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경주 남산에서 고대 애니미즘과 고등 종교의 관계를 체험할 수 있었다. 신라1,000년의 불상이 이처럼 한 산에 집약된 것은 오직 이곳뿐이다.

1988년 「통일신라 고려철불의 편년 시론」을 『미술자료 제41호』에 발표했다. 원래 이 철불(鐵佛)은 고려 시대 것으로 여겨왔으나, 어느 날 철불이 범상치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철불은 통일신라 시대 말기와 고려 시대에 성행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조사한 결과 철불은 이미 통일신라 시대 성기에 만들어졌음을 알았다. 이에 통일신라 8세기 중엽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철불을 자리 잡게 한 논문을 쓰게 되었다. 얼굴의 표현 방법이나 옷 주름 등 기운 생동하는 모습이조형성이 뛰어나 토함산 석굴암에 비견할 수 있는 명작으로 조명받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철불의 제작기법도 자세히 다루었다(사진 1).

1989년 「한국비로자나불상의 성립과 전개」를 『미술자료 제44호』에 발표했다. 여래형 비로자나불상은 신라 말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왔으나, 이미 776년에 만들어졌음을 증명했다. 보살형 비로자나불은 중국이나 일본에 많으나, 이런 여래형 비로자나불이 통일신라의 창안이었으며 왜 이런 형식의 비로자나불이 나타났는지 다루어본 것이다. 그보다 앞서 리움미술관 소장 <신라화엄경변상도>에는 보살형 비로자나불 삼존 형식이 나타나 있는데, 보살형이든 여래형이든 지권인(智拳印)을 맺은 비로자나불은 현재까지 중국보다 우리나라에서 훨씬 일찍 나타난
것으로 파악되며 지속적으로 성행했다. 비로자나불이란 법신불(法身佛)로서 절대적 진리인 만큼 불상으로 조성될 수 없는 것이나 차차 불상으로 만들어져 예배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법신(法身)과 보신(報身), 그리고 화신(化身)이라는 삼신사상(三身思想)을 미국 유학 시절 치열하게 공부하며 수많은 여래들이나 보살들의 계보를 나름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성립된 여래형 비로자나불은 독자적 불상 전개이므로 조각사 전체로 다루고 싶었지만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는 다루지 못했다.

1990년, <삼국시대 불상 조각 전시>를 기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기획전은 박물관의 존재 이유고 꽃이다. 박물관의 생명은 기획전이라는신념을 늘 가지고 있었다. 5~6년 동안 한 사람이 특정한 주제로 맹렬히 연구하면서 그 연구 성과에 따라 전시를 기획해야 하므로, 기획전이란 한국 미술사학이나 고고학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중요한 사명을 띤다. 나는 불교미술이 시작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의 금동불을 모두 모아 편년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의 미술 양식이 서로 다름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세 나라의 무덤 형식과 부장품의 성격이 크게 다른 만큼 삼국시대의 불교 조각 양식도 각각 특징을 가지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동안 동양의 소금동불 수천 점을 직접 들어보고 세밀히 조사하고 사진 찍었던 체험이 있는지라, 삼국시대 금동불을 모두 모아 전시를 기획했다. 작은 금동불은 높이가 20센티 내외로 너무 작고 단순하여 불상의 본질을 파악하기 가장 어려운 조각품인 줄을 그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사진1 보원사지 철불좌상

마침내 1990년에 제1 논문집 『원융과 조화』가 출간되었다. 첫 논문집으로 경주, 일본, 미국, 서울 등에서 공부하고 논문 쓴 것을 모은 것이다. 15년 동안 쓴 논문이 520페이지에 이르는 대저로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고 당시 평이 매우 좋았다(사진 2). 어려서 출가하여 10여 년 동안 탄허 스님을 시봉하다가 환속하여 불교 서적을 출간하고 있는 윤창화 민족사 대표는 『근현대 한국불교명저 58선』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사진2 첫 논문집 『원융과 조화』

“강우방의 『원융과 조화』는 중수필(重隨筆)형식의 시론(試論) 30여 편과 논문 10여 편, 그리고 600여 점의 도판이 수록되어 있는데, 주로 삼국 시대에서 통일신라 시대, 즉 6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조성된 불교 조각(불상)에 대한 연구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미술적 고찰은 물론 교리적 (종교학적) 해석까지 시도하고 있는 과감하고 대담한 책이다. 특히 1부 <한국미술사 방법론 서설>에 수록되어 있는 글 가운데 <미술사학의 독자적 방법론>, <불교 조각과 종교적 체험>, <불상 조각의 원리>, <미술사학의 대상>, <본질과 현상>, <존재와 생성>, <상대의 탐구>, <불교와 예술 표현의 자유>, <실존적 자각과 정각(正覺)>, <자아의 탐구>등 중수필 형식의 글은 불상 연구에 대한 그의 관점과 삶, 학문 세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글이다. 이러한 글들은 문장도 매우 아름다운 데다가 철학적 함의를 담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며, 그냥 한 편의 수필로 읽어도 좋은 글이다. 더구나 불교 예술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저자가 추구하는 학문적 과제로서 이런 시도는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불상 조각을 새로운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 조각은 불교의 신앙과 사상의 구상화이다. 불교 조각의 양식 변화에서는 시대 양식이 가장 중요한 만큼, 그것은 불교의 신앙과 사상 및 사건의 전개, 즉 불교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양식 파악에 있어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불교 사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 혹은 시대적인 종교 체험과 관련되며, 이것이 불교 조각의 형식과 양식에 근본적 영향을 끼쳐 왔기 때문에 미술사가도 불교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이렇게 주장한다. ‘불상은 부처를 조각한 것이다. 여래를 조각한 것이다. 깨달은 자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각에 있어서의 양감(量感), 면(面), 표면 구조 등 조형 언어를 통하여 부처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조각이야말로 경전보다도 더 직접적인 불교 사상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추상적인 개념이 가장 물질적인 것으로 구체화한것이 불상이기 때문이다. 그 조형 언어를 바로 읽을 줄 알게 되었을 때, 부처의 본질에도 닿을 수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또 예술에 대해서도 다음
과 같이 정의한다. ‘예술은 창조의 세계이다. 끊임없는 창조의 작업이다. 자연과 현실을 변형시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이미 고정된 문자의 개념으로는 끊임없이 고정된 개념들을 깨뜨리고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려는 예술의 창조적 세계를 표현하기 어렵다. 그것은 선종(禪宗)이 문자로 엮는 개념을 부단히 거부하는 작업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의 창작 행위는 끊임없이 개혁적이고 초극적이다.’ 그는 종교 예술의 본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양에 있어서 관념의 형상화가 종교 예술의 본질이다. 관념은 궁극에는 현실이 된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추구하면 노력에 따라 그것을 얻게 된다. 정신적인 자비심은 윤택한 생활을 가져온다. 천국을 늘 상상하고 염원하면 천국이 실현된다.그처럼 관념들, 숭고하고 아름다운 관념들은 신(神)들이 되고,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띠고 만들어진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이고, 문수보살은 지혜이고, 아미타여래는 무한한 생명이다.’ ‘수많은 부처가 시대의 부침을 타고 무량하게 만들어졌다. 한 국가의 부처가, 한 마을의 부처가, 한 개인의 부처가 만들어졌다. 조그만 금동불은 개인의 부처님이다. 무량한 중생들은 제각기 다른 근기와 소원을 지녔으므로 거기에 맞는 무량
한 부처를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그 하나하나의 부처는 우리 개개의 반영이다. 마음의 반영이다. 거울이다. 바로 그 부처들은 우리들이다. 우리들은 부처들이다.’ 불교미술과 예술에 대한 그의 개성미 넘치는 독특한 정의는 마치 한 구(句)의 명언을 감상하는 느낌이다. 또한 그는 불교에 대한 이해, 교리 사상적인 이해도 매우 높다. 불상에 투영된 불교 교의(敎義)에 대한 해석도 매우 명확하고 분명하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이해이다.”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등이 있다.

 

글.강우방

강우방  bulkwang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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