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서 불광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band

intagram

youtube

페이스북
밴드
인스타그램
유튜브


상단여백
HOME 월간불광 칼럼
[김택근 에세이] 산사의 가을밤

가을이 깊었다. 나무는 잎을, 사람은 생각을 떨군다. 이때쯤에는 사연을 지고 길 떠나는 사람이 풍경이 된다. 가을이 깊을수록 사람이 그립다. 앞서 걷는 사람의 등이 쓸쓸해 보인다. 작은 바람에도 우리들 사랑은 흔들리지만 다시 사랑하고 싶다. 문득 길손이 되어 잎 떨군 나무와 함께 걷고 싶다. 걷다가 곤해지면 키 큰 미루나무가 있는 마을에 들러 누군가의 꿈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싶다. 가을에서 겨울로 바람이 불면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른 ‘철새는 날아가고(El Condor Pasa)’가 떠오른다. 페루 전통 악기 삼포냐의 음은 가을 끝과 겨울 초입을 맴돌고 있다. 듣고 있으면 햇살조차 서늘하다.

황금의 나라 잉카제국은 이름만으로도 아프고, 인디오들이 경배했던 콘도르가 슬픈 전설을 입에 물고 페루에서 우리 땅으로 날아들 것만 같다. 얼핏 어디선가 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란 카페도 떠오른다. 그 카페에는 약간 나이든 여인이 담배를 태우며 로맹가리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있을 것 같다.
 

가끔 밖을 쳐다보면 나뭇잎이 떨어지고 철새가 비켜 날고. 우리는 가을 끝에 모여 있다. 낙엽은 쌓고, 바람 불면 사람들은 낙엽더미에 더 많은 생각을 뿌린다. 살아서 저 낙엽을 몇 번이나 밟을 것인가. 지상에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을은 잊혀진 이름과 얼굴들을 불러온다. 사는 것은 어쩌면 서로를 지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늘 껴안고 부비고 어루만졌던 것들은 어디로 흘러 갔는가. 다시 사람이 그립다.
“잎 지는 초저녁, 무덤들이 많은 산속을 지나왔습니다. 어느 사이 나는 고개 숙여 걷고 있습니다. 흘러들어 온 하늘 일부는 맑아져 사람이 없는 산 속으로 빨려듭니다. 사람이 없는 산속으로 물은 흐르고 흘러 고요의 바닥에서 나와 합류합니다. 몸이 훈훈해집니다. 아는 사람 하나 우연히 만나고 싶습니다. / 無名氏, / 내 땅의 말로는 /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그대….” (신대철 시, ‘사람이 그리운 날 1’)

 

이맘때는 산사로 가는 길이 특별하다. 고개 숙여 걷다가 눈을 들면 잎을 떨구며 서 있는 나무들이 마치 모자를 벗은 사내처럼 공손하다. 몇 년 전 가야산 백련암을 찾았을 때도 그랬다. 입구의 키 큰 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려 아는 체를 했다. 성철 스님은 언덕으로 건너가시고 스님이 남긴 삼천 배가 살아 있는 도량이다. 스님은 평생 누더기를 걸치고 진정한 무소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스님을 ‘가야산 호랑이’라고 불렀다.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있어도 사람들은 말씀을 얻겠다고 백련암을 찾아갔다. 스님은 누구를 막론하고 삼천 배를 시켰다. 감투와 돈 보따리는 가야산 소나무에 걸쳐두고 몸만 올라오라 했다. 나를 보지 말고 부처를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렀다. 삼천 배를 하고 난 사람은 달라졌다. 절을 마치면 비로소 자신의 교만과 위선이 보였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사람이 사람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백련암 뜰에서 가야산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검은 봉우리를 더욱 검게 비추고 있었다. 그때 한 무리가 법당에서 나왔다. 삼천 번의 절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그때 별빛만으로도 그들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속기가 지워진 얼굴에 별이 박혀 있었다. 그들 앞에 서 있음이, 아니 가을에게, 또 밤에게 부끄러웠다. 우주 아래 한 점도 안 되는 산에서, 그보다 작은 절에서, 그보다 작은 법당에서, 그보다 작은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한다. 그러면 한없이 작고 초라한 자신이 보였다. 그리고 나를 존재하게 했던 존재들이 보였다. 빛이 요사채 방문 틈으로 들어왔다. 그때 새 한 마리가 길게 울었다. 새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가을밤에 새가 울다니……. 새 울음에 산사의고요가 깊게 패였다.

그 울음이 흡사 제 몸 사르며 떨어지는 밤하늘의 유성처럼 느껴졌다. 다시 방문을 열고 나와 하늘을 봤다. 하늘가에는 눈물이 쏙 빠져버린 맑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신열과 아픔이 빠져나간 사랑이 있었다. 고독에도, 번민에도 속기(俗氣)가 묻어 있지 않았다. 죽음이 곁에 있다 해도 결코 음산하지 않을 듯했다. 산사의 가을밤은 그대로 참회이다.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머무는 곳에서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그 삶의 주인이 되게 한다. 하늘에는 별, 땅에는 사람.

김택근

시인, 작가.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오랜 기간 기자로 활동했다. 경향신문 문화부장, 종합편집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83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글. 김택근

김택근  bulkwanger@naver.com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