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상담실] 독도사랑과 자기회복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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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상담실] 독도사랑과 자기회복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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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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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상담실

일본 외상의 독도 영유권 주장 이래로 전 국민이 한 목소리로 일본을 규탄하고 독도 지키기 운동에 나섰다.
우리 불교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조계종의 송월주 총무원장을 비롯한 종단간부들과 군 법사들이 독도에 함께 모여서 '국토수호법회'를 열었다. 이러한 정신의 근원을 따져보면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와 사명 대사가 승병을 일으켜 누란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고자 하였던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을 것이다.
당시 서산대사는 나이 73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승병 1,500명을 이끌고 몸소 평양회복작전에 참여하여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며, 유정 사명대사는 전쟁이 끝난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담판을 짓고 전쟁포로 3,50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당시 일본 일들이 사명대사의 위엄에 눌려서 어쩔 줄 몰라했다는 일화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나의 머리 속에 생생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그만큼 그 당시 승려들의 정신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선조 대왕도 난을 피하여 의주로 옮기면서 조정의 중신들에게 국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의견을 물었을 때에, 한음 이덕형이나 오성 이항복과 같은 명재상의 말보다 사명대사의 말을 더 신뢰하였다.
선조 대왕이 말하기를 "고기 먹고 술 먹는 경들의 창자에서 나온 말보다 산중에서 나물이나 죽순을 먹은 거기서 나온 말이 깨끗하고 특출하다."라고 하면서 높이 평가하였다 한다.
후세의 일부 사가(史家)들은 임진왜란이 일본군의 퇴각으로 끝난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탓으로 돌리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우리나라의 민족정신과 불교정신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살아있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마침내 한일합방에 성공을 하자,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민족문화의 말살정책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불교의 탄압과 일본화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 불교계가 겪어야 했던 많은 혼란의 원인도 따지고 보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해방된 지 어언 반세기,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00여 년을 조금 넘긴 이 시점에 우리에게 그토록 큰 상처를 남겼던 일본이 다시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얼핏 보기에는 상투적인 주장 같지만 그 밑바닥에는 너무나 음흉한 저의가 깔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흔히 사람의 인생에서 실수는 반복되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한 번 이혼을 한 사람이 다시 재혼을 하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고, 사업에 실패를 해 본 사람은 다음 번에는 성공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자신의 지나간 실패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나 자각이 없는 한은 오히려 동일한 실수가 반복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국가적인 실패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임진왜란이나 한일합방 같은 오욕(汚辱)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자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함께 일본이라는 나라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은 명치유신이 일어나기 이전 약 800년 동안의 긴 세월을 무사들이 지배해온 나라였다. 흔히 막부(幕府)시대로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는 법이나 도덕보다는 칼의 힘이 지배하는 시대였으며, 철저한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힘센 자 앞에서는 복종함으로써 살아 남아야 했으며, 또 자신보다 약한 자는 철저하게 지배하는 주종관계가 성립되었다. 심지어는 무사가 자신의 칼이 잘 드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길가는 무고한 사람을 베어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위험한 세상을 살다 보니까 일본사람들은 속마음이나 표정을 마음놓고 드러내지 못하고 감출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난세(亂世)에서 살아 남기 위한 처세술이었던 셈인데, 이것이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다 보니까 일종의 민족적 특성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을 우리는 개인에게서도 발견할 수가 있다. 얼마전에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는 일류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기업에 근무하는 엘리트 사원이었는데, 이상하게 사람들 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고 자신감이 없어했다. 그런데 이런 증상은 자신보다 강한 자나 상사 앞에만 서면 더 심해지는 것이었다.
이 젊은이는 위로 세 살 위의 형이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형에게 많이 얻어맞으면서 자랐다. 처음에는 반항도 하고 대들기도 하였지만, 그럴수록 더 심하게 당하기만 하였다. 어머니에게 형이 때린다는 사실을 일러도 주었지만, 마침 어머니도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형의 편을 들면서, "엄마가 없을 때는 형이 엄마 대신이야. 네가 형의 말을 안 들으니까 그렇지."라고 할 뿐이다. 형에게 얻어맞아서 죽을 형편인데 아무도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까, 전적으로 형에게 굴복하고 형이 시키는 데로 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심리적으로 형의 노예가 됨으로써 살아남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비하시키게 되면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복종적이고 친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엄청난 분노와 적개심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적개심은 자신보다 약하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하면 자신이 당한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상대를 괴롭히는 행동으로 발전할 수가 있다. 흔히 일본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는 유달리 친절하며, 그리고 지나치리 만큼 고개를 여러 번 숙여서 인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친절의 이면에는 항상 상대가 자신보다 강한지 약한지를 마음 속으로 재어보는 간교함이 숨어 있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보다 약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야욕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들이 바로 임진왜란, 한일합방, 대동아 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 행위이며, 그 생생한 증거들이 명성황후 시해, 정신대사건, 중국인 생체실험 등으로 이어지는 잔혹행위들인 것이다.
지금은 비록 일본이 지도상의 작은 점에 불과한 독도를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지만, 만약 여기에서 우리가 의연하고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그 요구는 끝이 없이 확대되어 심지어 제 2의 임진왜란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비결은 바로 서산대사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승군(僧軍)을 일으킬 때와 같은 애국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민족적인 주체성과 자기를 회복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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