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에세이] 성찰 없는 시대에 ‘신미대사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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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 에세이] 성찰 없는 시대에 ‘신미대사 찾기'
  • 김택근
  • 승인 2019.08.2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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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랏말싸미>가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영화 속 신미대사가 스크린 밖으로 끌려 나왔 다. 요즘 신미를 폄훼하는 자들의 눈길에는 성찰 이 들어 있지 않다. 그저 날카로울 뿐이다. 무엄 한 일이다. 새삼 몇 년 전 신미가 주석했던 복천암을 찾 았을 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회주 월성 스님은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역’임을 확신했다. 월 성 스님이 내민 「복천사지」에는 한글 창제를 주 도했음 직한 여러 정황들이 실려 있다. 「세조어제 원문」, 「영산 김씨 세보」, 「복천보장」, 「상원사 중 수 권선문」 등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우리는 한글 하면 세종을 떠올린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실록에 그리 전 하고 있다며 이설(異說)은 철저히 경계하고 배척 한다. 한글문화연대의 <나랏말싸미> 관련 논평 중에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주역이라는 설은) 세종을 남 의 수고 가로채 자기 위신 세우려는 나쁜 임금, 못난 임금으로 몰아갈 위험이 매우 높다”라는 대 목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는 여백 이 없다. 어찌 왕이 혼자서 나랏말씀을 창제할 수 있는가. 아무리 재능이 특출해도 엄중한 국사를 밀 쳐두고 왕이 홀로 작업을 했을 리 없다. 분명 누 군가의 조력을 받았다. 그들이 누구일까. 집현전 학자는 아닌 듯하다. 한글을 창제한 직후 최만리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 를 올린다. 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었다면 반대 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종은 조 력자들을 밝히지 않았을까.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유교의 나라에서는 밝힐 수 없는 사람들 이라면 스님들이 아니었을까. 신미는 속명이 수성(守省)이고 문장가 김수온 의 친형이다. 10살에 사서삼경을 독파했고, 이후 에는 대장경에 심취했다. 범어와 티베트어를 공 부하여 40세 즈음에는 막힘이 없었다고 전해진 다. 신미는 아마도 범어 원전을 원음대로 옮기고 싶었을 것이다. 뜻글자인 한자는 범어를 음역하 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신미는 소리글을 만들어 보고 싶었을 것이다. 대제학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전 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 게 보기와 뜻을 들어 보이시면서 이름하여 훈민 정음이라 하셨다. 꼴을 본뜨되 글자가 옛날의 전자와 비슷하다”고 밝혔다.

여기서 본뜬 글자가 ‘옛날의 전자(古篆)’라 함은 여러 설이 있다. 범자 및 티베트어 기원설, 몽골 파스타 문자 기원설, 태극 사상 기원설 등이다. 그중 범자에서 따왔다 는 설이 가장 오래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신미 와 동시대 인물인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한글 은 범자에 의지해서 만들었다”고 했고, 이수광도 『지봉유설』에서 “언서(諺書)는 글자 모양이 범자 를 본떴다”고 했다. 세종이 소리글을 탐구했던 신미에게 도움을 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종은 ‘한자의 기득권’ 을 지닌 집현전 학자들은 멀리하고 안평, 수양대 군과 신미를 중심으로 학조와 학열대사 등 승려 들에게 따로 새 글을 연구하라 일렀다고 한다. 그 연구 공간이 대자암, 현등사, 진관사, 흥천사, 회 암사 등이었다고 한다. 불가에서 내려오는 얘기 이다. 그렇다면 신미의 업적은 왜 정사에 나오지 않을까. 아마 억불숭유의 시대였기에 승려들이 한글 창제를 도왔다면 결코 이를 반포하고 유포 시킬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공적을 감 춰야만 유림들로부터 신미와 한글을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자. 유교 국가임에도 왜 최초의 한글 번역서들이 불교 경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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