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한 물건] 호미
상태바
[작가들의 한 물건] 호미
  • 양민호
  • 승인 2019.07.01 17: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마리의 초식 동물처럼 호미는 놓여 있다. 호미는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이 초식 동물이 들판을 파헤치면 흙 속에서 식물들이 솟아 나온다. 식물들을 먹고 사는 동물이 아니라 식물의 씨앗을 뿌리는 동물. 할머니는 이 동물을 평생 키우셨다. 그리고 밭에 나가 일을 하며 비가 오는 날에는 비를 맞으며 흙을 갈아엎고 풀을 뽑아냈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밭에서 일했고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잠깐 감나무 그늘에 앉아 양은 도시락 속의 보리밥을 물에 말아 드셨다. 장아찌 하나로, 고추장 한 숟갈을 반찬으로 도시락을 비웠다. 그러고 다시 밭이랑을 보다 일을 시작했다. 호미는 지치는 법이 없다. 늙고 고집 센 당나귀처럼 일을 시작하는 호미와 할머니는 닮아 있다.

초등학교 때는 늘 나도 밭에 나가 일을 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새벽부터 온 식구들이 밭으로 걸어갔다. 밭은 산 중턱에 있었고 길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소를 끌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 안개가 우리 바짓가랑이 사이로 흘러갔다. 밭이 멀기도 멀어 도착하면 이미 지쳐 있었지만 안개가 걷힐 때까지 아버지는 밭을 갈고 누나들은 자루가 달린 농기구로 흙을 모아 둑을 만들었다.

비닐을 씌우기 위해서는 호미가 필요하다. 이 초식 동물은 흙을 모아 비닐 끝에 흙을 올리고 기어코 바람에 펄럭이는 비닐을 파묻고 지나간다. 해가 뜨고 안개가 걷히면 식구들은 말없이 비닐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참깨를 몇 알씩 넣었다. 길고도 지루한 노동을 견디는 것이 어린 시절에 배운 가장 커다란 자산일까. 나는 아직도 고집 세게 노동을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때론 타인을 너무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그 노동을 견디지 못한다면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포기했다는 자책감이 들기에 스스로를 노동이라는 흙덩어리에 파묻는다.

호미는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이미 나 자신이 호미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그것은 어릴 적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이해하지 못하는 할머니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잠을 자는 것처럼, 나는 천천히 호미를 받아들인다. 고향의 산 중턱에서는 아직도 늙은 부모님들이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다. 가끔 부모님을 따라 밭에 가면 나는 금세 지쳐 밭둑에 앉아 쉰다. 노동이란 하나의 수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끝없이 수양을 거듭하면 어느 경지에 이르게 될지 모른다. 그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부모님은 견딜 수 있을지도, 아니면 경지에 오르기 위해 수행을 거듭하며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밭을 가는 소도 지치고 부모님도 지치고 나도 지치는 봄날, 뽑혀진 풀들이 시들어가는 것을 본다. 우리도 저렇게 시들어가고 있다.

어릴 적 할머니가 종일 밭에서 일하고 저녁에 돌아오면 나는 어떻게 저렇게 오랜 시간 일할 수 있을까 이해하지 못했다. 시든 풀처럼 할머니는 누워서 일어나지 못한다. 할머니는 노동이 즐거워서 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하기 싫어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할까.

나이가 든 지금은 조금 이해할 것 같다. 그 노동은 자신을 견디기 위해, 힘겨운 삶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그것만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체념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슬픔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삶에 체념하지 않기 위해 그 체념, 슬픔의 깊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것이 할머니의 노동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시집와서 아무도 모르는 산 너머에 나무를 심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