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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 에세이] 나의 어린 시절강우방의 자전적 에세이 - 나의 삶, 나의 학문 2
공무원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와 형제들. 12남매 였지만, 전쟁통에 5남매만 남았다.

만물이 부처 아닌 것이 없으니,
만물이 보주 아닌 것이 없구나..
그러므로 부처는 보주라!

내가 기적적으로 발견한 침묵의 조형언어로 쓴 조형예술작품에서 충분히 증명해서 설명해왔다. 부처님은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존재하여 왔다. 과거에도 갠지스강가의 모래알만큼, 무량한 부처님이 계셨다고 싯다르타 태자는 말씀하시지 않았더냐.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암울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나는 고구려 수도 국내성 가까운 곳에서 1941년 12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바로 한 해 전 아기를 지웠는데 그 이듬해 기어코 세상에 나왔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로부터 먼 훗날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조형들을 풀어내면서 세계에서 처 음으로 ‘조형언어의 존재’를 알아냈고 그 ‘조형언 어의 문법’을 찾아내어, 마침내 세계의 조형예술 작품, 인류가 창조한 일체의 조형예술작품을 완벽 히 읽어내는 쾌거를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고구 려 땅의 대모지신大母地神의 도움이 없이 어찌 이런 역사적 문제가 풀릴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고구려 벽화에서 어찌 ‘옴마니파드메훔’ 주문呪文 을 해독했으며 그 주문이 조형화된 고려청자를 어 찌 알아 볼 수 있었겠는가. 이상한 일은 ‘옴마니파 드메훔’을 해독했다고 스님들께 말해도 무슨 뜻인 지 묻는 분이 한 분도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해방이 되자 우리 가족은 만주를 떠나기로 했다. 1945년 가을, 아버지는 하얀 새 운동화를 사주셨 다.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새 신발을 신고 즐거운 기분으로 해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팔짝 팔짝 뛰 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와 나는 걸어서 서울 로 향했다. 기억은 그 뿐이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평양에서는 네 거리에서 무릎까지 긴 구두를 신고 교통을 정리하는 ‘로스케’ 소련군을 보기도 했다. 갖은 고생 끝에 서울에 도착했고 먼저 도착한 아 버지와 형들을 만났다.

아버지는 나를 경복궁 앞에 있었던 명문인 수송壽松초등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하여 수송동으로 이사하셨다. 입학하자마자부터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기로 자자했다. 해방 후에도 아버지는 계 속 세관에 다니셨고, 일본에서 만든 색연필과 화 판을 구해 주셔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3학년 무렵 6.25가 터졌다. 미처 피난을 하지 못 한 우리 가족은 서울에 머물렀다. 어렸으므로 누 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 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전쟁놀이를 가장 재 미있어 한다. 그런데 정말 전쟁이 일어났으니 믿 기 어려울 만큼 흥미로운 나날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일 매일 그 전쟁놀이가 극적이고 경이로웠다. 크고 둔중한 B-29기가 날아와 큰 폭탄들을 연달 아 떨어뜨리는 광경은 큰 구경거리였다. ‘쌕쌕이’ 는 놀라웠다. 비행기 소리가 ‘쌕’하고 나는 쪽을 바 라보면 비행기는 어느 덧 보이지 않고 이미 저 멀 리날아가버려잘잡히지않았다.바로작은제 트기였다. 하루 종일 전쟁놀이 정신이 팔려 있었 다. 그러나 9.28 수복 직전에는 공포의 나날도 있 었다. 공습이 시작되자 서울 전체가 불타기 시작 한 것이다. 중앙청에도 불이 났다. 파편이 튀어 우 리 집 마루에도 꽂혔다. 가족이 모두 마루 밑 지하 실에 모여, 함께 죽자고 둥글게 얼싸 안았다. 우리 집 형제는 12남매였는데 위로 7남매를 이미 여읜 상태였다. 5남매만 생존했다. 우리는 전쟁 중에 관 계가 더욱 끈끈해 졌다. 쌀을 모두 걷어가 먹을 것 이라고는 감자뿐이었다. 매일 매일 끼니를 근근이 이어가는 시간이 계속됐다. 이제는 누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게 되었다. 그 숨 막히고 치열했던 마지막 한 달 동안의 체험은 아직도 마음에 생생히 남아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이 압 록강까지 치고 올라가자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밀 려왔다. 1.4후퇴 때는 아버지가 마련해준 작은 세 관 순시선을 타고 어머니와 작은 형, 누나와 함께 서해안을 따라 부산으로 향했다. 겨울인데도 파도 는 없었고 잔잔한 바다를 유유히 미끄러지고 있었 다. 서해안은 지극히 고요했고 평화스러웠다. 그 러나 다시 전세가 불리해지자 순시선은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했다. 제주도에서 6개월을 지내 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부산에서 3년에 걸친 비교적 평온한 생 활이 시작되었다. 모든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려들 자 산 위에 판자 집들이 가득 들어섰다. 부산 중심 의 용두산에 수송국민학교가 임시교사를 마련하 자 선생들과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나무에 칠판을 걸고 공부했다. 그 해 부산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 다. 큰 누님은 부산의 의사와 결혼해서 자리를 잡 았다. 부산이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서울 수송동 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마지막 소학교 6학년 2 학기를 마치고 아버지의 판단으로 경복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판단이란, 경복중학교는 일본이 경 영하던 학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강직한 분이었다. 형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헤방되기 전 일본 관동군을 수색했다가 큰 곤욕을 치를 정 도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느 날 신의주에서 일본 관동군 대좌의 행동을 수상히 여겨 몸수색을 했는데 거기서 허리춤에 감춘 보석을 적발하셨다 는 것이었다. 밀수를 한 것이 적발되어 처벌받을 것을 걱정한 일본 장교는 다음역에서 육혈포로 자 결했다. 부하들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협박해 아 버지는 오랫동안 금강산에 피신하신 일이 있었다. 서슬 퍼렇던 일본군 지휘관도 수색할 정도로 아버 지는 강직하신 분이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산을 좋아해서 친구들과 북한산을 자주 올랐다. 진흥왕 순수비도 어루만졌지만 그 존재의 참뜻은 알 리 없었 다. 그로부터 나의 산행山行은 시작되어 평생 산 오르기를 좋아했다.

3년간의 격동기를 체험하며 가족이라든가 우리 민족에 대한 관념이 어슴푸레 생기게 되었다. 귀 중한 체험이었다. 나도 모르게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했으리라. 유년기에 독립과 한국전쟁이라는 가장 큰 변화를 겪었으나 부모님의 현명한 선택으 로 평화스럽게 지낸 셈이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국어 선생님이 여름방 학 숙제로 일기를 써오라는 명을 내렸다.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동대문 시장에 가서 씨앗들을 샀 다. 봉투에는 아름다운 꽃 그림들이 있었다. 마당 에 씨앗을 묻고 아침저녁으로 정성껏 물을 주었 다. 채송화, 붓꽃, 국화, 한련 등의 싹이 흙을 비집 고 나왔다. 특히 한련旱蓮은 줄기가 끝없이 자라 지 붕 처마로 향해 오르자 끈을 매어 주었더니 덩굴 이 끝없이 타고 올라가다가 옆으로 자랐다. 한련 꽃은 색이 아름다웠다. 붓꽃은 가을에 까만 씨앗 을 맺었다. 매일 매일 관찰해 모든 꽃들이 변하는 흥미로운 과정을 자세히 일기로 써서 방학 후 제 출했다. 나이 지긋한 여성 국어 선생님이 며칠 후 나를 불렀다. 그 때 상황이 아직도 또렷하다, 선생 님은 옆에 서 있는 나를 한참 응시하더니 문학을 하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그 때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그로부 터60여년후<보주의실체>를추구하는3년동 안, 서울 강남구 삼성동 아파트에서 종로구 부암 동 연구원까지 이르는 길가에서 피고 지는 꽃들을 스마트 폰으로 치밀하게 찍었다. 수십만 장은 족 히 되리라. 꽃을 관찰하고 사진을 찍은 것이 ‘조형 과 자연의 관계를 밝히는 작업’을 하게 된 것과 무 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는 사이 시詩가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와 3년 간 300여 편 가량의 시를 썼다. 이렇게 나의 길은 <보주를 찾아가는 선 재동자의 길>이 되어 마침내 여래와 보살의 실체 를 찾아내었는데, 그 씨앗은 이미 소년시절에 움 트기 시작되었음을 뒤돌아보게 된다.

또한 중학교 시절에는 산을 좋아해서 친구들과 북 한산을 자주 올랐다. 진흥왕 순수비도 어루만졌지 만 그 존재의 참뜻은 알 리 없었다. 나중에 불상을 연구하기 시작해서는 더욱 산행이 잦아졌다. 매주 산에 올라 마애불을 조사하게 되었다. 나의 삶은 산과 뗄 수 없는데 그것은 이미 중학교 때 시작된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 제1학기가 시작하자 갑자기 공부하 기 싫어서 담임선생님께 거짓 병을 칭탁稱託하고 휴학했다. 첫 일상으로부터의 일탈逸脫이었다. 그 리고 부산으로 내려가 매일 영화를 보며 놀았다. 영화감독을 꿈꾸었다. 당시 헐리우드 영화들은 충 격적이며 경이적이었다. 어둠 속에서 영화 한 편 을 보고 밖으로 나와 환한 빛에 보이는 현실을 보 면, 영화보다 더 새롭고 정화된 놀라운 세계였다.

한 학기 동안 섭렵했던 그 많은 영화들은 내게 큰 영향을주었다.그런어느날아버지가돌아가셨 다는 소식에 용두산으로 올랐다. 슬픔도 모른 채 그저 먼 바다를 바라 볼 뿐이었다. 그렇게 유소년 시절은 그럭저럭 지나갔다.

고교시절 철학과 정치, 문학을 논하면서도 낙천적이었던 친구 한태순. 그는 브라질로 가 크게 성공했지만,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자 내 삶에 큰 변화를 일으 킨 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입학을 하고 얼마 안 되어 한태순韓泰淳이란 친구가 자기네 동아리에 들 어오라는 것이었다. 공부도 별로 열심히 하지 않 고 친하지도 않은 사이인데 뜻밖의 제안이었다. 조용한 나는 그리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한 태순, 홍순호, 이민용, 김광섭, 원우현, 강우방, 이 렇게 모여 동아리가 이루어졌으며 ‘삼천리회三千里 會’라고 이름을 지었다. 작명은 태순이 몫이었다. 태순이는 좌장 격이었다. 그는 독서를 많이 해서 정치, 문학, 철학, 사상 등 막히는 데가 없었다. 그 가 열변을 토하면 모두가 놀라워했다. 그는 미성美 聲이었다. 밤에 함께 걷다가 이태리 오페라의 아리 아를 부르면 모두가 홀린 듯이 그의 노래를 들었 다. 그는 스케이트도 잘 탔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일주일 동 안 읽은 책을 발표했다. 대학생들이 읽는, 수준 높 은 책들이었다. 독서도 그다지 하지 않았던 터라 심한 열등감에 장고에 들어갔다. 내가 할 일은 무 엇인가. 이 동아리에 그대로 머물러야 하는가. 말 주변도 없는 나는 발표할 때 마다 더듬거렸다. 열 등감은 더욱 더 심해갔다.

그 때부터 독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도 교과서를 읽지 않고 교과서 위에 다른 책을 놓 고 읽었다. 난해한 책들을 읽어서 이해하려고 애 쓴 것만 기억나지 무슨 책을 읽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는 매주 만나서 읽은 바를 토론했으 나 가장 뒤쳐진 나는 그들을 따라갈 수 없어 열등 감은 더욱 깊어졌다. 불안 증세 마저 생기기 시작 했다. 주말에는 동대문 고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그 당시에는 동대문 거리에 고서점이 즐비했다. 그 당시 즐겨 읽던 잡지는 ‘사상계思想界’였다. 매달 사서 정독했다. 그러는 사이 1, 2등을 다투던 성적 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훌륭한 영어선생님 이 계셔서 영어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선생님 은 부교재를 만들었는데 세계의 고전들에서 뽑은 명문장들을 모은 책이었다. 플라톤, 셰익스피어, 괴테, 헤밍웨이 등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인간이 낸 책에서 명문장만을 고른 것이었 다. 매우 난해한 책이었지만 애써 해독하고 나면 기쁨이 컸다. 그래서 큰 소리를 내며 읽곤 했다. 그 러는 사이에 영어가 나도 모르게 늘어 훗날 대학 에서 매우 어려운 영문 원서를 읽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미국 유학도 가능해졌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이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일단 끝내고 공부에 매진하여 성적을 올려놓아야만 했다. 어느 날 한 참 보이지 않았던 태순이가 문득 나타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원래 그의 고향은 평양이 었다. 해방 후 홀어머니와 남하했다. 고3때 갑자 기 그가 월북을 시도하다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 다. 밤새 노를 저어 월북을 시도했지만 해류 때문에 제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체포되 어 간첩으로 몰려 사형이라는 즉결심판을 받았다 고 했다. 장교는 태순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채 뒷산으로 끌고 올라갔다. 장교는 총을 겨누어 방 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가 났다. 그러나 태순은 쓰러지지 않았다. 허공을 향하여 총을 쏜 것이다. 그리고 빨리 도망하라고 소리치고는 내려갔다. 태 순은 뒷산을 넘어 서울로 와서 학교에 나타나 2 학 년으로 복학했다. 장교는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의 박학다식한 식견에 탄복하여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태순이는 오히려 장교를 설득했던 것이 다. 생사를 넘나드는 큰 사건을 겪었지만 그는 여 전히 명랑하여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상상할 수 도 없는 그의 용감함과 도전 정신과 낙천적 태도 는 나를 감동시켰다.

복학한 그 해에 그는 교지에 <형이상학이란 무엇 인가>란 논문을 실었다. 그러나 너무 어려워서 읽 을 수 없었다. 그는 그로부터 10년 후 브라질로 밀 항하여 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전통무용가와 결혼 까지 하여 행복한 모습의 사진을 보내곤 했지만 결혼 이듬해 항상 모험을 좋아한 그는 산에서 오 토바이 사건으로 즉사했다.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5 년 전에 나는 북악산 밑의 고등학교를 찾았다. 도 서실에 가서 그의 글을 찾아 읽고 싶었기 때문이 다. 그 어린 나이에 어려운 주제를 어떻게 써나갔 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래 전의 교지 는 보존되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조숙했고 다른 친구들은 몰라도 나에게는 영웅이었다. 그가 나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원래 나에게는 일

상으로부터의 일탈의 성향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 나, 내 삶을 관통하는 지속적인 일탈의 경향은 그 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또 다시 청소년 시절은 지나갔다.

 

 

강우방
1941년 중국 만주 안동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을 역임하고 2000년 가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초빙돼 후학을 가르치다 퇴임했다. 저서로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법공과 장엄』,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의 방법론』,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민화』 ,『미의 순례』,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등이 있다.

강우방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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