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스님이 삼가귀감을 저술한 까닭
상태바
서산 스님이 삼가귀감을 저술한 까닭
  • 권서용
  • 승인 2018.01.29 13: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산 스님이 본 유교]
휴정(休靜, 1520~1604) 호는 청허(淸虛)·서산(西山)

|    서산西山

억 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불에 떨어진 흰 눈 한 조각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가고, 땅과 허공이 꺼져 버렸네.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이 시는 고려의 태고 화상에 의해 개창된 선불교를 다시 중흥한 서산 휴정의 임종게이다. 선사의 법명은 휴정休靜, 자호는 청허자淸虛子,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머물렀기 때문에 백화도인白華道人, 묘향산에 오랫동안 계셨기 때문에 호를 서산西山이라고 하였다. 속성은 완산 최 씨, 이름은 여신汝信이고 자는 현응玄應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세창世昌이며 지방에서 시와 술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삼았고, 어머니는 김 씨,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꿈에 한 노파가 와서 말하기를 “지금 뱃속에 있는 아이가 대장부이므로 어머님께 경하慶賀드리기 위해 왔습니다.”라는 태몽을 꾸었다. 그다음 해인 1520년(중종 15년) 3월 26에 스님은 태어났다. 

9살 때 어머니가 죽고, 10살 때는 아버지마저 돌아가 외로운 고아가 되었다. 목사가 데리고 서울로 가서 성균관에 입학시켜 주었지만, 울적하여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마침내 동학들과 함께 남쪽 지리산으로 내려가서 명승지를 두루 둘러보고, 불경과 사서삼경 등 여러 경전을 탐구하였다. 그러나 항상 조실부모한 슬픔에 잠겨 생사 문제에 더욱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러던 중 홀연히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을 얻어듣게 되었다. 마침내 부용영관芙蓉靈觀 스님을 찾아가 법문을 듣고 발심하여 숭인 화상崇仁 和尙을 양육사로, 부용 선사를 법사로 모시고 출가를 하였는데 서산의 나이 21세, 1541년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산은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승병을 거느리고 평양 싸움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서울까지 회복하고 임금을 환궁하게 하고는 “늙은 몸으로 군사를 맡을 수 없다.”하여 사임하고, 제자 사명과 처영을 천거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그 뒤 금강산과 지리산 그리고 묘향산 등의 여러 산을 왕래하시니, 따르는 제자가 늘 1천여 명이 되었고, 그 법을 이어 출세한 제자가 70여 명이 있었다. 남여藍輿를 타고 묘향산의 각 절을 다 돌아보고는 원적암圓寂庵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상당 설법을 하신 뒤에 당신의 진영眞影을 가져다가 그 뒷등에 글쓰기를 이렇게 썼다. 

팔십 년 전엔 저가 나인데, 팔십 년 뒤엔 내가 저일세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