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 양산 통도사 달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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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벽화이야기] 양산 통도사 달마도
  • 강호진
  • 승인 2017.08.01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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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달마는 없다
사진 : 최배문

늦깎이로 불교철학을 공부하면서 몇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첫째로 공부는 젊을 때 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공부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앞의 두 가지가 다 있더라도 학문적 재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학문적 재능은 일반적으로 공부를 잘한다는 의미, 즉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정답을 잘 찾아내는 능력과는 무관하다. 철학에 있어 학문적 능력이란 세상을 끊임없이 삐딱하게 바라보는 눈, 그러니까 주어진 텍스트와 세간의 상식을 매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대면하는 활발발活潑潑한 정신을 의미한다. 불교철학을 하는 데 학문적 결기가 중한 이유는 불심佛心과 학문 사이에서 갈등하다 주저앉는 이들이 유독 많기 때문이다. 

불전에 기록된 모든 것이 진리라 믿는 호교론적 입장에선 불교철학이란 말이 불편할 수도 있다. 경전이나 어록에 대한 지고지순한 신심信心이야말로 불교학의 요체인데, 그 텍스트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주된 업으로 삼는 철학이 끼어드는 것이 못마땅할 것이다.

불교계에서 불교‘철학’이란 말보단 불교‘교학’이란 용어를 선호하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불교를 믿는다는 자체가 비판적 시각으로 철학을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신과 세상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본능에 가까운 집착을 해체해버리는 비판적 시선이야말로 불교의 출발점이 아니던가. 그 시선은 얄팍한 진영논리에 휘둘리지 않는다. 2,600년의 불교사상사란 불교로 불교를 비판한 제 살 깎아 먹기의 기록이다. 긴 세월 동안 불교가 살아남은 비결은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해 의심과 긴장을 놓지 않았던 이들이 ‘불교는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정의한 주류와 싸움을 멈추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붓다 이래 불교사상사를 수놓은 수다한 싸움들 가운데 가장 과격하고 치열했던 싸움판을 하나 꼽으라면 중국의 선불교를 앞에 세울 것이다. 물론 ‘제2의 붓다’나 ‘보살’이란 별칭을 부여받은 용수(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도 만만치 않다. 용수의 저작을 읽다보면 광활한 전장을 혈혈단신으로 누비며 적을 닥치는 대로 베어나가는 무장의 칼춤이 보인다.

그러나 천하의 용수조차도 “모든 희론을 적멸하는 상서로운 연기를 가르쳐주신 붓다에게 예경합니다.”라는 문구를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의 귀의처가 붓다임을 밝힌 데 반해, 선불교의 선사들, 특히 남종선 계열의 조사들은 불교의 근본부터 부정하는 파격을 보여준다. 그들은 교주인 붓다를 똥 막대기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고, 붓다의 말씀을 담은 경전은 고름을 닦아낸 종이라고 일축해버렸다. 영원한 고향, 붓다에게 되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끊어버림으로써 자신을 백척간두에 세웠다. 영화 <아저씨>에 나오는 대사처럼 “오늘만 사는 놈”을 이길 순 없다. 오늘만 사는 놈, 그것이 선불교가 지닌 괴력이자 매력이다. 

선불교의 도도한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보리달마菩提達磨라는 발원지와 만나게 된다. 불자치고 그의 초상 하나 집에 걸어놓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니 설명을 더하는 것은 덧없다. 정작 필요한 것은 달마에 관한 신화적 거품을 걷어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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