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방랑기] 양주 회암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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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방랑기] 양주 회암사지
  • 이광이
  • 승인 2017.06.1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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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흥망성쇠에 관한 옛 이야기가 소곤소곤 들려오는 곳
양주 회암사지 / 사진 : 최배문

봄의 들은 야野하다. 들은 거친 투쟁의 현장이지만, 봄 들은 부드럽고 욕망으로 가득하다. 꽃은 속살이 비치는 여인의 실루엣처럼, 손짓하며 관능을 부른다. 벌이 꿀을 따러 꽃에 내려앉아 날갯짓을 할 때, 꽃가루가 꽃가루받이 위에 떨어지고, ‘야합野合’이 이루어진다. 그 경이로운 순간, 새로운 생명은 잉태한다. 꽃은 이제 더 아름다울 이유가 없다. 벌을 유혹하여 번식의 소임을 마쳤으므로, 금세 시든다. 또 다른 생존은 씨앗의 몫이다. 민들레 씨 주머니는 이륙 준비를 마친 우주선 같다. 120여 개의 씨앗 하나하나가 새 별을 찾아 항해하는 탐사선처럼. 로켓은 바람이다. 바람이 불면 씨앗은 모선을 떠나 이륙한다. 새 생명은 기약도 없이 떠올라 어디론가 날아간다. 어디로 데려갈까? 여린 씨앗이 의탁할 곳은 어디인가? 사는 것이 본래 그렇게 막연하고, 통 모르는 일 투성이다. 바람은 돌에 멈춘다. 바람이 내려준 돌 밑, 이윽고 그곳에 씨앗은 유랑을 멈추고 뿌리를 내린다. 민들레의 생존과 번식은 우리의 ‘살며 사랑하며’와 닮았다. 천년의 사지寺址에는 돌들이 흩어져 있고, 돌 주위에는 얼굴을 맞대고 풀꽃들이 피어 있다.

 

양주 회암사지 / 사진 : 최배문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 천보산 아래 부채꼴로 펼쳐진 축구장 5개 크기의 거대한 절터, 전각이 262칸이었고, 암자가 17개에 달했으며, 15척 되는 불상이 7구나 있었고, 승려 3천 명이 살았다는 여말선초 제일의 왕찰王刹. 지금 그곳은 빈 들이다. 돌과 풀이 가득하고,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인도의 고승 지공 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하지만 『동국여지승람』에 회암사의 기록이 있어 창건은 그보다 앞선 11세기 후반으로 본다. 회암사는 지공 대사의 제자 나옹 화상에 이르러 중창되면서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나옹懶翁은 ‘게으른 늙은이’라는 뜻인데, 어느 경지에 올랐음을 그 이름이 보여준다. 나옹의 제자가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는 유명한 무학無學 대사다. 지공 - 나옹 - 무학은 법맥을 이은 사제 간으로 회암사의 3대 화상이다. 나옹은 고려 공민왕의 왕사이고, 무학은 조선 태조의 왕사다. 이렇듯 한 나라가 멸망하고 새 나라가 건국되는 권력의 혼란기에 회암사의 주지스님은 왕의 스승으로, 일국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으니, 그 권력과 위세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회암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이 있으니, 20년간 사실상 여왕으로 군림했던 조선 최고의 여걸 문정왕후다. 드라마 ‘옥중화’에서 김미숙이 열연했던 여인. 중종의 세 번째 부인으로 딸 넷을 줄줄이 낳고, 노심초사 끝에 아들 하나를 얻어 그가 12세에 즉위하니 명종이다. 문정왕후는 8년간 수렴청정을 하고, 그 뒤 죽을 때까지 12년간 최고 통치자로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는 『명종실록』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이는 윤 씨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고 묘사되면서, ‘사직의 죄인’으로 기록될 만큼 악평을 받았다. 하지만 국정을 논하면서 유교적 남성 관료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던 탁월한 정치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억불숭유의 국시 속에서 불교를 장려했다. 승려 보우를 발탁하여 병조판서에 임명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하기도 했다. 전국에 300여 개의 절을 공인했으며, 도첩제를 부활시켰다. 갑작스런 불교 부흥정책에 유교 집단의 반발이 컸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은 회암사 주지로 부임한 보우 스님이 도맡아 추진했고, 회암사는 권력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회암사는 세조비 정희왕후에 의해 재차 중창이 이뤄지고, 문정왕후에 이르러 또다시 대규모 불사가 이어지니, 조선의 국찰로, 해동 제일의 가람으로, 눈부신 한 시대의 영화를 누린다. 보우 스님은 회암사 중창불사를 마치고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를 열었다. 1565년(명종 20) 초파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문정왕후는 성대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목욕재계를 했는데, 그 뒤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65세.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유생들은 전국에서 들고 일어났고, 보우를 처형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보우 스님은 초파일에 제주로 유배되어 거기서 피살됐고, 회암사는 불길에 휩싸였다. 지공에서 나옹으로 무학을 거쳐 보우에 이르는 200여 년 동안 왕위를 물려준 태조와 효령대군이 머물렀고, 세조의 왕비와 명종의 모후가 불사를 일으켰던 조선 제일의 대가람이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양주 회암사지 / 사진 : 최배문
양주 회암사지 / 사진 : 최배문

 

나무는 불타도 돌은 남는 법. 폐허가 된 사지에 당간지주와 승탑 같은 석조물들은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250여 년이 흐른 순조 21년(1821), 이응준이라는 지방 토호가 법당 터를 조상 묘택으로 쓰기 위해 승탑을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스님들이 분노하여 들고 일어났고, 큰 문제가 됐다. 결국 이응준은 섬으로 유배되고, 조상 묘는 철거되었다. 거기서 수습된 이 씨 조상의 유골은 스님들이 똥통에 빠뜨려 버렸다고 한다. 사지 유적들을 보호하기 위해 절터 뒤편에 작은 절을 하나 짓게 되는데, 그것이 봉선사 말사인 회암사다. 사지는 정비만 하고, 복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회암사는 순조 때 재창건된 절이어서 회암사와 회암사지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당초 회암사는 유적 관리용 암자여서 작은 당우 한 동에 보잘 것이 없었다. 몇 해 전 주지 혜성 스님이 하나둘 불사를 일으키면서 지금의 어엿한 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절 동편 언덕에는 회암사 3대 화상의 승탑과 석등, 석비가 남아 있다. 특히 무학 대사 승탑과 쌍사자 석등은 조선 전기 부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꼽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지공 대사와 나옹 화상의 승탑과 석등도 단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온전한 모습이면 국보급일 것을, 사라진 몸돌을 대체한 것이어서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양주 회암사지 / 사진 : 최배문

혜성 스님이 차를 한잔 내어주면서 “어때요?” 하고 묻는다. 사지에서의 느낌, 그것을 뭐라 할까? “절도 있고, 절터도 있고 그래서 좋습니다.”라고 답했다. “절의 모습을 갖추어 놓으니까 사람들이 꽤 찾아옵니다. 여기는 왕찰이었고, 별궁이었어요. 권력의 중심지였지요. 그러니까 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기를 받는다고 할까요, 뭔가 얻어가려고 옵니다. 얻는다는 것이 뭘까요? 버릴 줄 알아야 얻을 수 있습니다. 찬란했던 권력만 보는 것은 하나만 보는 것이고, 권력의 무상함을 봐야 진짜 보는 것이에요. 박근혜 보세요. 정치하려는 사람들이 권력의 무상함을 깨달아야 그 권력을 바르게 쓸 것 아닙니까?”

저녁 공양을 마치고, 해 질 무렵 절에서 승탑 아래로 이어진 길을 1km쯤 걸어 다시 들로 나왔다. 붉게 물든 당간지주의 그림자가 길다. 은성했던 은殷나라의 궁궐터에 보리이삭만 패어 있다는 탄식처럼, 사지는 돌과 풀뿐이고, 석양빛이 붉다. 돌은 천년을 하루처럼 살고, 풀은 해마다 윤회하면서 만날 것이다. 둘은 서로 의지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돌은 제국의 흥망성쇠에 관한 아득한 옛이야기를 풀에게 들려주는 듯하고, 풀은 어디에서 생겨나 바람을 타고 여기 와서 꽃피게 되었는지, 그런 야한 이야기를 돌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사지는 절의 무덤이다. 사지를 걷는 것은 오래된 뭔가를 끄집어내는 시간여행 같은 것이어서 애잔하고 쓸쓸한 일이다.   

양주 회암사지 / 사진 : 최배문
양주 회암사지 / 사진 : 최배문

 

 

 

 

 

 

 

 

 

 

 

 

 

이광이

전남 해남에서 1963년에 태어났다. 조선대, 서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산과 절이 좋아 늘 돌아다녔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됐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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