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성학] 여자는 날씬하고 예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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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성학] 여자는 날씬하고 예뻐야 한다?
  • 관리자
  • 승인 2007.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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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성학

우리는 주변에서 '뭐니뭐니 해도 여자는 날씬하고 예뻐야 한다'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여성지의 아름다운 여성이 되기 위한 갖가지 광고들은 이러한 사회적 통념을 더욱 부추기며 예쁜 여자가 되라고 보채며 세뇌를 시키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여성들에게 환상적인 화장으로, 섹시한 몸매로, 드래시한 옷차림으로 아름다워지라고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덜 날씬하거나 덜 '미인'인 여성, 젊지 않은 여성은 마치 정상적인 여자의 반열에서 낙오한 여성이라는 착각에 빠져 들게 한다. 남자는 능력으로 평가되고 여자는 젊고 아름다운 외모로 평가되는 이같은 신화은 여성들로 하여금 외모 콤플렉스에시달리게 하고 여성 스스로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빠져 들게 만든다.
미인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조선시대 미인은 반달같은 눈썹에 크지 않는 눈매, 버들가지같은 한들 한들한 몸매와 티없이 희고 맑은 피부를 들고 잇다. 옛날 중국사람들은 발이 작아야 미인이라고 생각했고 서양사람들은 허리가 개미허리처럼 가늘고 가슴이 풍만해야 미인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이 콜셋트 입는 장면은 작은 허리 사이즈가 당시 미인의 자존심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작은 발을 만들기 위해 어려서부터 발을 동여매는 중국의 전족 관습이나 서양 여성들의 가느다란 허리를 만들기 위해 고안된 허리 졸이개인 콜셋트는 그 시대 미인의 기준과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 시대, 한 사회, 상류층 남성들이 요구하는 미인의 기주에 따라 시대마다 사람들은 여성의 몸을 이렇게 뜯어 고치고 저렇게 뭉치고 비틀어서 그들의 기준에 맞는 미인을 만들어 냈다. 여성들은 그 사회의 여성으로 길러지면서 여성에 대한 가치관을 내면화 하고 외모가 여성의 본질인 양 착각한다. 여성들은 마치 자발적으로 그 틀속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 같이 보이고 외모에 집착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듯이 비춰진다. 여성이 아름답기만을 바라는 관습과 이를 만들어 내기 위한 기술들은 여성의 몸을 자연 그대로 유지하거나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몸을 스스로 학대하게 하고 상처를 내며 고통을 감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언젠가 여성의 몸에 관한 기록영화를 본 적이 있다. 여성의 허리 치수가 미인의 잣대로 사용됐던 기간동안 서구 여성들은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겹의 철사줄이 들어 있는 콜셋트로 숨을 못 쉴 정도로 허리를 강제로 졸이고 옷을 입는 과정에서 자궁이 아래로 처지고 갈비뼈가 기형적으로 위로 불거진 것을 볼 수 있었다. 할머니들이 흔히 애낳고 잘못되면 밑이 빠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당시 서양여자들은 콜셋트 때문에 밑이 잘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중국여성들의 전족과정을 보여주는 화면은 더 비참했다. 여아가 4 - 5 세 정도가 되면 발가락을 뭉쳐서 겹겹으로 양발을 동여 매는데 그때부터 소녀들은 마음대로 뛰어 다닐 수도 없고 바깥출입도 통제된다. 그 상태로 어른이 되면 발가락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살이 엉켜 붙은 상태로 발육이 정지되어 발가락이 없는 3 - 4센치 정도의 기형적인 작은 발을 자랑스럽게(?) 가지게 되고 비로소 미인의 조건 하나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관습의 이름으로 발을 매고 고통스러워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나 기둥을 붙들고 서서 허리를 졸여 매는 서양 숙녀의 모습, 그리고 귀, 입술, 코 등 닥치는 대로 구멍을 뚫고 장신구를 매달고 십여 개의 목굴레를 달고 목이 사슴같이 길어진 아프리카 여성의 모습을 보면서 고금을 통하여 세계 곳곳에서 행해졌고 지금고 다른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는 예뻐지기와의 전쟁이 지겹기만 하다.
이와 같이 한 사회가 지닌 미인에 대한 기준과 통념은 여성으로 하여금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감수하게 하는 여성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미인이 되기 위해, 그리고 더 예뻐지기 위해 여성들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 어머니도 그랬고 우리도 그랬고 또 우리의 딸들이 치르고 있는 '예쁜 여자 되기'의 전쟁은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취업을 앞둔 여상 졸업반이나 여대생들은 성적이나 실력보다는 외모가 예뻐야 입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는 선배의 뼈아픈 경험담을 귀에 꼭꼭 담아 넣고 성형외과의 문을 두드린다. 거기에서 여성의 육체에 가해지는 '미인 만들기'의 과정은 상상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못난 여자는 취업에서도 결혼시장에서도 기타 인간관계에서도 능력 이전에 외모로써만 평가되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다이어트를 하고 실패의 위험을 알면서 성형수술을 감행하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후세의 우리 후배들은 이런 외모 만들기를 무엇이라고 평을 할까? 필자가 전족풍습을 보며 '말도 안돼'라는 분노를 느꼈던 것처럼 '어떻게 그런 짓을?'이라며 현대인의 비인간적인 미인 만들기에 분노를 터뜨릴까?
어떤 여성은 날씬해지려고 다이어트를 하다가 졸도하는가 하면 살이 찌면 보기 싫어진다는 잠재의식이 음식 거부 증세를 일으켜 굶어 죽는 사례도 있다. 도대체 예뻐지는 것이 뭐길래 수술도 죽음도 불사하고, 누구를 위해 그 누군가의 눈맛에 맞추기 위해 몸이 상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예뻐지려고 하는 것인지. 왜 여자는 뭐니뭐니해도 예뻐야 한다고 몰아 부치는가?
여성의 외무 콤플렉스는 '여성의 운명은 남자 손에 달렸다. 결혼 잘하는 것이 여자의 성공이다. 여자는 독립하면 위험하다. 남자에게 의존하여 그의 가정을 지키는 것이 안전빵이다.'라는 신화를 믿으면 믿을수록 증세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미하일로 마르코비치라는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예쁜 외모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면 먼저 '나는 나'라는 여성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하며, 남자의 눈높이에 따라 맹목적으로 외모를 가꿈으로써 자신을 육체적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고 했다.
여성이 외모에 무관심하고 톰보이같이 하고 다닌다고 해서 외모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보는 의식이나 여성 자신이 남성 의존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미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주체적인 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자연스런 몸 그대로, 여성의 느낌과 시각으로 여성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외모 가꾸기를 찾아 보아야 할 것 같다. 뚱뚱한 아줌마도 아름답다. 개성적으로 생긴 여성도 아름다울 수 있다. 여성적인 우정의 눈으로, 육체와 정신이 이루어진 인간으로 보면 예쁘지 않은 여성이란 없는 것 아닌가. 여성이 의식의 변화를 통해 외모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아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여성해방이란 말은 그렇게 거창한 말이 아니다. 중국여성이 전족의 횡포에서 해방된 것도 여성해방의 하나이고 그 시대의 미인 규격품에서 자유로와진 사람도 여성해방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외모 콤플렉스는 여성의 몸을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여성의 삶 전체를 왜곡시킨다는 생각을 하면서 순간 비구니 스님의 거칠 것 없는 복장과 '여성'적인 외모에서 멀리 벗어난 자유로운 모습에서 시원한 한줄기 해방의 바람을 느껴본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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