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에서 잠시 한국에 다니러 나온 후배가 저녁 늦게 전화를 했다. 낮에 전화를 몇 번 했는데 통화가 안 되어서 미안한 것을 무릅쓰고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한다고 하면서 언제 전화를 하면 집에 있느냐고 대뜸 묻는 것이었다.
"언니, 여기 있는 여자들은 낮에 뭘하길래 집에 있는 사람이 없죠? 언니는 일이 있느니 그렇다 치고 제가 알고 있는 친척이나 친구들은 대개 직장을 가지지 않고 살림하는 주부들인데 예의를 차려서 아침 10시쯤 전화를 하면 통화를 하고 싶은 장본인은 없고 '지금 외출중이오니 삐 소리가 난 다음에 메모를 남겨 주세요.'라는 소리만 듣는 게 고작이에요."
그 후배가 이상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필자 자신도 친구나 친지에게 전화 할 일이 있으면 아침 일찍 하거나 저녁 늦게 한다. 낮에 해 봐야 헛수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됐건 간에 요즈음 여자들은 바빠 죽겠는데 라는 말을 유행어처럼 자주 쓴다. 사실 직장에 다니는 소수의 주부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집사람'으로 불리어지는 주부들이지만 옛날 어머니들처럼 닦은 마루를 또 닦고 가구에 윤내며 집안사람으로 살던 때와는 역할이나 가사노동의 내용이 사뭇 달라졌다. 생활 패턴이 달라진 탓도 있지만 가사노동은 집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연장되어 집을 비우고 외출해야 할 일이 종종 생기게 마련이다.
또다른 하나의 변화는 특히 젊은 가정주부 중심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즉 부부가 가사노동을 함께 해나가야 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가정에서 요구되는 어머니나 아내 역할만을 고집하지 않고 주부의 자아실현도 여성의 삶에서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서 상대적으로 자아실현에 관심을 가진 주부들이 여성 자신을 위해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는 경향이 짙다.
이러한 움직임은 자녀를 다 키운 40대 여성들로 하여금 새롭게 젊은 날의 자신의 꿈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고 있으며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배움의 욕구와 열기가 대단한 것 같다.
자아실현을 찾아 나선 주부들의 이 같은 요구에 발맞추어 주부를 대상으로 대학들의 평생교육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신문사, 방송사의 문화센터를 비롯하여 주부대학 및 강좌들이 즐비하게 입맛대로 마련되어 있다. 취미 교양 프로에 못지 않게 여성 대상의 건강과 미용을 위한 시설도 다양하게 열려 있다.
스포츠 센터나 헬스 센터에는 수영 볼링 등 각종 운동 렛슨, 사우나, 운동 기구 등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주부들은 시간이 가능한 낮 시간 동안 어느 것이든 선택하여 단련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런 교육기관 주변에는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주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주부들이 의욕에 찬 눈을 반짝이며 바쁜 시간을 쪼개면서 더 바쁘게 살고 있다.
주부로서 어머니로서 자식 교육 뒷바라지가 좀 많은가 말이다. 학교 선생님 찾아 봐야지, 엄마들 만나 과목별로 과외 그룹 짜고 좋은 선생 물색해야지, 그리고 주부 노릇도 잘 해야 하니까 장 봐야지, 기타 쇼핑, 은행, 관청 볼 일, 친척 방문, 잦은 결혼식 등 바깥으로 연장된 자질구레한 가사노동 차원의 남편 보조적인 일을 보러 다니다가 보면 집안 사람보다는 집밖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이 주부의 현실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한국 주부들은 종교 활동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라고 말하듯이 수많은 기독교 교파에다 불교를 비롯한 7대 기존의 종교 외에 유사종교에 이르기까지 여성신자의 숫자가 대단히 많다. 어느 종교랄 것 없이 여성신자가 많은 이유를 어떤 사람은 여성이 종교심이 원래 강해서 그렇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한국의 결혼과 가족 구조가 너무 여성 억압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하기도 한다. 사실 기독교쪽을 보아도 그렇고 불교쪽을 보아도 그렇다. 각 종교마다 여성신자는 숫적인 면에서나 종교활동 측면에서 중요한 집단으로 남아있다. 특히 불자를 보면 통칭 보살님으로 불리어지는 여성신도들이 법회 참석률도 많고 불사도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포교 등 각종 불교활동도 열성있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이 중산층 여성들은 주부역할 외에도 각자 형편에 딸 자아실현이나 건가와 몸단련, 종교활동 등 어디엔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이 가야하고 시간도 내야하고 자연 스케쥴이 점점 바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주부들은 보면 학교 동창 모임이나 친목계 모임 몇 군데 정도는 다들 나가고 있다고 본다면 언뜻 생각해 보아도 줄잡아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데 낮에 전화해서 통화할 수 있는 확률이 낮다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현모양처 노릇 잘하고 결혼 장례 등 체면 닦고, 자아실현 위해 배우고, 친구 모임 가서 숨통 좀 틔우고 그리고 성불제중을 향한 종교활동까지 열심히 하는 주부를 상상해 보면서 이들 여성 중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여성들이 직장인보다 오히려 더 바쁘게 뛰어 다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가질 때도 있다.
50대 주부들의 하소연을 들어보면 자식들 시집 장가보내면 한가해 질 줄 알았는데 시원한 것은 잠깐이고 혹이 하나 더 붙어서 더 일이 많아진다고 한다. 시어머니, 장모, 할머니 노릇이 덧붙여져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더 바빠지더라는 이야기다.
이만 하면 한국의 주부들이 낮에 집에 앉아서 한가하게 걸려오는 전화를 왜 받을 수 없는가를 그 후배가 들으면 대충 알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수긍이 갈지 모르겠다. 이해를 할까? 평생교육원에서 주부들에게 사진을 가르치고 있는 젊은 여교수는 공부하겠다고 등록한 주부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적극적으로 자기 세계를 가진 사진가가 된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취미로 좀 하려고 한다는 주부들을 보면 답답하고 화가 난다고 한다.
자아실현이 취미로 교양정도로 우아한 현모양처의 모습을 가꾸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느냐는 것이고 안이한 주부들에게 어떻게 하면 의욕과 용기를 불어넣어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한다는 것이다.
많은 주부들이 이 교양강좌에서 조금 듣고 다시 다름 문화센터에 가서 다른 것을 듣고 하는 식으로 뷔페식 공부를 하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과정에서 그럴 수 있지만 원하는 진로를 찾으면 꾸준히 한 우물을 파는 정열과 노력이 있어야 작은 꿈이나마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된다.
사람이나 사귀고 친목이나 하겠다는 태도는 염불보다는 잿밥에 마음을 두는 격이기 때문에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엄두도 못 낸 채 그렁저렁 시간만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떤 주부들은 한술 더 떠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사랑 받는 아내로서의 주가를 높이기 위해서라든가 '남편이 무시하기 때문에' 남편의 태도를 고치려고 왔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낮 동안 집을 비우고 시간을 할애하면서 나도 자아실현을 해보아야지 하는 야무진 생각을 가지고 자기를 찾아 나서는 주부들은 많다. 그런 겉으로 자아실현을 하고 싶기는 하지만 골치 아프게 공부 따위는 하기 싫다는 주부가 있는가 하면 너무 잘 해서 남 앞에 자기가 드러나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는 성공 콤플렉스 증상을 보이는 주부도 있다.
현모양처의 역할과 역할에 함몰되어 자아를 잃어버린 주부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쌓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기와 만날 수 있겠는가? 종교의 신자가 된다는 것 역시 자기와 마주서서 참 나를 찾아 나서는 길이 아닐는지? 자기를 찾고 자아실현도 하고 싶어하는 주부들은 뜻과 길은 동전의 앞뒷면의 관계이기도 하며 문을 두드리는 것과 열리는 것 역시 연결된 하나의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배지숙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