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중국 낙양의 백마사와 용문 봉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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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순례기] 중국 낙양의 백마사와 용문 봉선사
  • 관리자
  • 승인 2007.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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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의 백마사와 용문 봉선사

1991년 8월 10일 서안 남대가를 거처 1976년 작고한 주은래(周恩來)수상의 건의로 착공해서 지난 6월에 개관한 서안역사박물관 관람에 나섰다. 그야말로 인민정부가 자랑하는 건물이었다. 선사시대부터 명청(明淸)에 이르는 문물의 변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이었다. 발굴에 의한 출토품이 하도 거창해서 우리의 작은 유품과 비기자니 절로 주눅이 들었다. 모름지기 대륙과 반도의 솜씨의 차이였다. 특히 벽화전시실에서 고구려를 침공해서 우리의 문적을 거두어 불태웠다는 이적(李勣)의 전시관과, 옆방의 이천(李 )의 전시관은 바로 제왕의 능묘가 무색했고, 더욱 이 벽화에서 고구려의 사신행렬인 듯한 옷갓차림을 보고 스스러운 심사가 솟았지만 한편 반갑기도 했다.

 박물관에서 나와 낙양행 기차시간이 남아 차를 몰아 서안시가를 돌며 성벽과 성문을 보고, 종루(鐘樓)옆에 우리 임시정부 광복군의 지대가 묵었다는 자리를 둘러본 뒤, 유명한 만두(鮫子)로 점심을 들고 곧장 신축중인 낙양역에로 달렸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역광장 앞에 옛성벽을 고스란히 보전하는 당국의 용의주도였다.

 이윽고 2시 40분발 차를 타기 위해 그동안에 안내를 맡아준 정대철(鄭太哲)씨와 작별하고 침대차에 올랐다. 낙양은 서안에서 무려 387km로, 8시간이 걸리는 당나라의 제2수도 동도(東都)다. 글쎄 이런 먼길, 그러니까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데, 제왕이 이웃마을 가듯 행행(行幸)한 행렬을 상기하면서 과연 우리나라 정조(正組)의 능행도(陵行圖)의 몇 배나 됐을까 짐작해 봤다.

 특히 이 낙양에의 길은 일찍이 두보가 좌습유(左拾遺)로서 안록산란(755)때 패전의 책임을 재상인 방관(房琯)에게 돌리는 숙종(肅宗)에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진노를 사서 경읍(京邑)인 화주(華州)의 말단직에 좌천됐다가 드디어는 배기지 못하고 물러나 낙양 동쪽 공현(鞏縣.현재 鞏義市) 북망산 선영에 고별하고 진주(秦州.현재 天水市)로 떠돌이의 삶을 떠나며 오간 길이다. 이때 전란에 시달리는 임민의 곤고를 리얼하게 고발한 중편시 (삼리三史)와 삼별三別)을 눈물로 간고른 길이어서, 우정 항공편을 마다 하고 기차를 탄 나였다.

 워낙 건조한 고장인데다 봄내 가물어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이 타고 있었고, 냇물은 말라 황사의 퇴적으로 이뤄진 황톳길에서는 누런 먼지가 일고 있었다. 당나귀가 이끄는 마차와 털털거리는 경운기와 타이탄 트럭이 간혹 보일 뿐 모두가 자전거였다.

 한편 옆칸에는 이태리 여행단이 탔는데, 내 가방의 태극마크를 보고 올림픽의 나라 코리아라면서 거침없이(Hand in hand)(손에 손잡고)를 부르며 나를 이끌어 겅중겅중 춤까지 춘다. 실로 보람찬 88올림픽이었음을 실감했다. 이윽고 낙양에 도착해서 국제여행사 가이드인 서정렬(徐正烈)의 마중을 받아 곧 모란 호텔에 짐을 풀었다. 홍콩과의 합영체여서 저녁은 양식으로 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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