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강좌] 널리 가르침을 펴다 / 김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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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강좌] 널리 가르침을 펴다 / 김영태
  • 김영태
  • 승인 2007.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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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밀 교학강좌

불교는 자비의 가르침

우리 불교에서는 진리세계를 자기화한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자를 부처님이라고 하지 않고 아라한 혹은 벽지불이라고 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곧 아라한이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벽지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 불교의 영원한 부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다운 참모습은 당신 혼자 깨달은 세계에 만족하는 그것이 부처님이 아닙니다. 남을 떠난 당신이 없기 때문에 우주의 진리를 완전히 깨달았으면 우주전체가 자기가 되는 그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많은 속성이, 모든 생명을 가진 중생들이 다 아프고 쓰라리고 괴로워하고 있는데 당신 혼자 해탈했다고 즐거워 한다면,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화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심이 넘쳐 흘러야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경전이나 범어로 된 고전을 보면, 보리수하에 앉아서 공부하기 시작한 그동안을 싯귀로 읊었던 것에 자심수도(慈心修道)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자심을 수도했다. 자비로운 마음을 닦았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이룬 뜻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비로운 마음이 없으면 부처님이 아닙니다.

가족중의 한 분이 아프다거나 내가 아프다고 할 때에 병원에 가서 고칠 수 있는 병은 병원에 가면 고칩니다. 그러나 지운 죄에 의해서 얻은 병은 그렇게 해서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부처님의 자비의 힘에 의해서 고쳐집니다. 우리가 나무석가모니불이나 나무관세음보살님이나 또는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염불· 염법을 하게 되면, 부처님 자비의 힘이 작용하여 그 공덕력에 의해서 무심결에 지은 죄업이 소멸되어서 병이 나아집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침의 길에 나서서 제일 먼저 어려움에 부딪힌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사슴동산이라고 하는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를 제도하고 다시 55명의 야사 친구를 제도하고 60명의 제자가 생겼을 때, 그때 60명에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다 모든 것에서 해탈했다. 나처럼 깨달았다. 죄업에 허덕이고 고통에 허덕이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할 능력이 있다. 그러니 지금부터 각처로 흩어져서 많은 사람을 일깨워라. 한 사람이 두 번 길을 가지 말고 두 사람이 한 군데로 몰리지도 말고 각각 흩어져서 넓게 확산되어 일깨움의 길을 찾아서 가거라. 나도 우루빈라취락의 장군촌으로 가서 삼가습을 제도하겠다.」하면서 길을 나섰습니다.

그 삼가습 중에는 제일 큰형님인 우루빈라가습 다음 나제가습, 가야가습 이렇게 3형제가 있었는데, 부처님이 찾아갔던 곳은 우루빈라 큰형님한테로 간 것입니다. 찾아와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재워준 곳이 바로 자기네들이 섬기는 불지신, 독용이 있는 굴 안에서 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용이 자기 먹을 음식이 하나 앉아 있어 잡아먹으러 나옵니다.

그런데 독을 픔고 불을 뿜었는데 부처님 몸에는 이르질 못합니다. 결국은 이튿날 아침에 70이 넘은 노 가습이 제자들을 시켜서 그 수행자가 우리 용한테 잡혀 먹혔을 테니까 청소시킬려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주 평화로운, 아주 밝은 모습으로 빙그레 웃으며 앉아 계신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참 편하게 잤습니다. 좋은 잠자리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인 선생님께서도 잘 주무셨읍니다까?」 한 나라의 대덕이니까 바로 이 우루빈라 가습의 위치가 오늘날 로마 교황청의 교황과 같은 위치였습니다.

그러면서 부처님께서는 바릿대를 내놓습니다. 바릿대 속에는 조그마한 실용이 도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이 이것이 바로 당신이 섬기는 불용이요, 나는 생명을 조금도 다치지 않기 때문에 이 불용의 비늘하나 건드리지 않고 병하나 다치지 않고, 수염하나 다치지 않게 했다. 고스란히 그대로 둔채 그 독용의 독을 빼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하나의 실용으로 몸은 하나도 안 다쳤고 작아졌을 뿐이지 그 못된 재주라든지 사람을 해치는 것, 살해하는 기운을 빼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에 노바라문 우루빈라 가습이 탄복해서 무릎을 꿇고 그것을 이겨낸 힘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그것은 자비의 힘이다가고 대답했습니다. 자비의 힘으로 그 무서운 독용의 독을 빼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센 힘이, 그래서 최승자가 되는, 가장 슬기로운 자가 되는 그 힘이 바로 자비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오공이 아무리 하늘 것을 내어다 먹고 하늘을 제 마음대로 왔다갔다 해도 부처님 손바닥에서 그냥 놀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의 힘에 의해서는 무의식중에 지은 죄업을 소멸시킬 수도 있고 지금의 여러 가지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일찍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자비로운 힘을 스스로 장애하는 어리석음하고 또 무의식중에 지은 죄업이 두터워져 자비의 빛은 자꾸 가려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 부처님의 자비가 통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염불· 염법하는 것이며, 참회하는 것입니다. 불상 앞에서 절하는 것, 그것이 참회입니다. 영원한 진리이신 부처님을 우리는 업장이 두터우니까 못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상을 통해서 볼려고 합니다. 그 앞에서 참 마음의 눈이 떠질 수 있도록 자꾸 참회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왜 부처님께서 그런 과정을 겪어야만 했느냐 하면 그 당시 인도의 재래종교의 관점 또는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해력이 도저히 당신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설명해봐야 못알아 듣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중생들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시다가, 그중 그래도 오묘한 이 진리를 알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진리를 찾아보다가 못찾은 실패자가 제일 알아듣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고행을 벗어던진 것을 타락했다고 욕하고 고행림을 떠나버린 다섯수행자를 찾아 나서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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