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너머] “사과 한 알이 절로 붉어질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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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너머] “사과 한 알이 절로 붉어질 리 없다.”
  • 최원형
  • 승인 2016.10.05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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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 소장

낙엽 태우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때가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하드보일드’한 도시도 가로수가 노랗고 빨갛게 물들기 시작하면 여기 혹은 저기서 낭만의 정서가 얼마간은 유지될 것이다. 아무리 예전 같지 않다 해도 여전히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다. 게다가 햇볕은 열매 속으로 스며들어 온갖 달곰하고 달짜근하며 달콤한 맛으로 현현하는 계절, 가을인 것이다! 

내 생각에 올해 과일은 유난히 달다. 며칠 전 달고 싱싱한 사과를 잘 먹고 빈 봉지를 버리려다 봉지 뒷면에 적힌 글귀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사과가 본격적으로 수확되는 것은 가을이지만 사과농사는 지난해 겨울부터 시작되었다.’로 써내려간 글을 읽으며 나는 경북 봉화의 어느 사과 과수원을 상상해봤다. 지난해 가을, 사과수확 이후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사과나무 가지를 치고 퇴비를 뿌려 땅심을 돋우느라 분주하다. 

4월 하순쯤 되면 사과나무에 싹이 트고 5월 초가 되면 팝콘 터지듯 꽃이 피어난다. 꽃을 솎아 주느라 바쁘다. 꽃이 열매로 바뀌는 오뉴월에는 열매를 솎아주는데 이때 나무 밑에 풀이 많이 자라지 않도록 베어 줘야 한다. 

8월부터 11월까지 사과를 수확하고 나면 또다시 내년 농사를 준비한다. 내가 맛나게 먹은 그 사과는 지난겨울부터 바삐 움직였을 농부의 손을 거친 덕분이라는 것에 깊이 감사했다. 그런데 감사한 마음을 농부의 손에서 끝낼 수가 없었다.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며 바지런을 떤 벌이 아니었다면 사과가 맺힐 수 없었을 테고, 뜨거운 볕이, 적절한 비가, 그리고 뿌리 내린 흙이 건강하지 않았다면 사과 한 알이 어찌 내 앞에 놓일 수 있었을까? 그러니 그 모든 유정들, 무정들이 은혜로운 존재일 수밖에.

사과 한 알이 절로 붉을 수 없듯이 가을이면 황금색으로 물드는 들녘 역시 저절로 황금빛이 되었을 리 없다. 트인 물꼬로 ‘콸콸콸’ 물이 흐르고, 무논에 개구리 소리가 봄밤을 까맣게 새고 나면 갈색 논은 어느덧 초록이 된다. 벼 포기가 심어진 논바닥에는 손가락 반 마디도 채 안 되는 옆새우가 물속 플랑크톤을 먹으며 살고 있다. 장구애비도 송장헤엄치게도 그곳에 살고 왕우렁이도 산다. 논바닥을 들쑤시며 다니는 미꾸라지가 있어 벼의 뿌리가 튼실해진다. 

벼메뚜기, 벼멸구, 끝동매미충이 벼를 괴롭힐 때 사마귀, 깡충거미, 청개구리가 나타나 이들을 꿀꺽 해치운다. 그리고 백로가 온다. 서로가 먹고 먹히며 벼를 키운다. 논은 육상생태계에서 매우 중요한 습지이며 생물종다양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곳이다. 지구 육지면적의 6%가 습지인데 그곳에 지구 생물종의 40%가 서식하고 있다. 

가을날 단내가 논두렁을 넘어 물씬 풍겨오더니 이윽고 황금빛으로 변한다. 그 황금빛이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으로 식탁에 올라왔다. 밥 한 그릇에 무수한 생명들의 삶과 작렬하던 태양의 숨결과 거센 태풍의 호흡이 담겨져 있다. 그러니 내가 날마다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이 단지 지갑에서 꺼낸 몇 푼어치일 수가 없다.

2014년 10월 평창에서 열렸던 제12차 생물다양성협약(CBD) 당사국총회 이후 결성된 ‘생물다양성 한국시민네트워크’ 행사가 올해 세 번째로 열렸다. 나는 첫 해부터 빠짐없이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파주 수원청개구리 서식지가 어떻게 보전 혹은 파괴되고 있는지에 관한 소식, 순천만에 해마다 오는 흑두루미 소식, 인천 남동유수지의 저어새 소식에서 주남저수지 보전과 재두루미 소식, 거제도 남방동사리와 산양천 소식, 봉하마을 화포천에 날아온 황새 소식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방대한 양의 얘기를 한자리에서 생생하게 들을 기회가 내게는 오직 이 행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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