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재를 넘어 미륵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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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를 넘어 미륵님께로
  • 관리자
  • 승인 2007.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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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밀 국토를 찾아서/중원 미륵사지

고구려의 비로 널리 알려진 유물은 만주 즙안현의 광개토대왕비이지만 남한 지역에 현존하는 고구려비는 오직 이 유물뿐이다. 이곳 마을의 이름은 용전리 立石(입석)마을이다.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조사단에 의해서 고구려비로 판명되기 전까지는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선돌[立石]에 지나지 않은 채 오랫동안 동네 이름의 유래가 되어왔다. 자연석의 한쪽면을 갈아 예서풍으로 대략 400여 자를 새기었는데 마멸이 심하여 읽기가 매우 어려우나 고구려의 관직 이름과 성의 이름이 분명하여 고구려비로 확정되었다. 아마도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그 세력이 이 지역까지 미치게 되고 그 기념으로 이 비석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그 시기는 5세기 후반이 될 것이다.

이곳에서 다시 얼마되지 않는 거리의 탑평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 남한강변에 우뚝 서 있다. 중원 탑평리 7층 석탑이라는 공식명칭이 있지만 보통 중앙탑이라고 불리우는데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 까닭이다. 높이는 14.5m로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는 가장 크고 또한 거의 완형으로 남아 있어서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탑은 평지에서 우뚝 솟은 언덕에 자리한 채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어 행여 홍수의 피해를 입을까 하여 이런 자리를 잡았으리라 짐작된다. 근처의 밭이나 논에서 신라시대의 기왓장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거나 탑앞에 있는 8각연화대석이 그대로 잔존하는 점으로 추측해보더라도 원래부터 높지막히 자리잡고 앉아 오고가는 배들의 중요한 이정표 구실도 하였을 것이다.

옛날에는 많은 물자수송이 배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할 때 남한강 강안에 흩어져 있는 절이나 사지들-신륵사, 법천사지-과 이곳 탑평리 유적들이 그 당시에는 단순히 사찰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물길을 오고가는 행인들의 쉼터요, 숙박처요,기도터였으며 또한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는 만남의 장소였으며 이 강안의 중요시설을 경비하는 군사들의 주둔지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중앙탑은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가늘고 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안정감이 부족한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오고가는 배에서 바라볼 때는 하루의 행선을 가늠하는 좋은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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