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늙은이 조주의 하루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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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늙은이 조주의 하루살이
  • 불광출판사
  • 승인 2016.06.08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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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염송」이나 「벽암록」 따위를 들추어보면 조주라는 이름이 자주 나온다. 내가 알기로 조주는 열일곱 살에 남전을 찾아간다. 그리고 남전을 마흔 해쯤 모신다. (스승과 제자 사이였으니, 겉으로는 모셨겠지만 어느 때부터는 흉허물 없는 언니 아우나 길벗으로 지냈겠지.) 남전이 저승길 떠난 뒤에 조주는 그 무덤자리를 세 해 지켰다고 한다. 조주가 홀가분하게 떠돌이로 나섰을 때는 나이 예순이 넘었다. 그 뒤로 스무 해 동안 길에서 산다. 그야말로 길손이고 나그네다. ‘조금 멋진 양말(西歐言語)로 하면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고나 할까.’ 나이 여든이 되어서야 다 쓰러져가는 조그마한 절집에 들어 주지살이를 한다. 조주 꼴이 이렇다. 머리가 가려워서 긁으면 비듬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거짓말 좀 보태서 서 말쯤 앞에 쌓인다. 옷은 더 말할 나위 없이 거지 가운데 상거지 꼴이고, 다 낡아 모서리가 모지라지고 군데군데 흙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돗자리가 깔린 방에는 변변한 이부자리도 없다. 어쩌다 코빼기를 내미는 마을 어중이떠중이는 모처럼 절집 찾아왔는데 차 한 잔도 내놓지 않는다고 투덜거린다. 탁발을 나서면 좁쌀 한 움큼 내놓으면서 생색이 여간 아니다. ‘아까운 양식인데, 길 닦음(수도)이나 부지런히 하슈.’ 풀이 무성한 절집 마당에는 마을 사람들이 소를 풀어놓아 소똥이 한가득인데, 정작 밭갈이 하겠다고 소를 빌려달라면 두 손을 홰홰 젓는다. 가끔 머리 깎은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중들이 지나는 길에 들렀다가 시건방만 잔뜩 떨고 휑하고 떠나버린다… ….

         조주가 「하루 열두 때 노래(十二時歌)」에 풀어 놓은 넋두리가 이렇다. 이 소리를 보고(觀音) 처음 들었던 생각은 ‘그래, 그래. 중도 다 늙어빠져 뒷바라지해 줄 사람이 없으면 그냥 이 꼴이지. 그러게 따까리 노릇할 상좌 한 놈 제대로 골라야 하겠다고 눈에 불을 켤 수밖에.’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삐딱한 곁눈질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나 보기에 이것은 선불교 역사에서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없을 ‘깨달음 노래(悟道頌)’다. 여든이 넘어서야 조주는 저를 제대로 보고 이웃을 있는 그대로 본 것이다. 그 뒤로 조주는 마흔 해를 더 산다. 나는 선禪의 역사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조주의 말모음(어록)은 거의 모두가 여든 넘은 늙은이의 입에서 나왔다고 본다.

손발놀림과 몸놀림은 젊은이들 몫이다. 부지런히 손발 놀리고 몸 놀려서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밭머리에서 땡볕에 김을 매면서 입을 놀리는 일은 없다. 콩삯에게 잘 자라라고 부추긴다고 해서 콩잎이 힘을 얻는 것도 아니고, 같이 자라는 풀들에게 싫은 소리를 한다고 해서 움츠러들지도 않는다.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부지런히 손발 놀리고 몸 놀린다는 말은 딴 말이  아니다. 열심히 일한다는 말이다. 보짱(百丈)이 ‘하루 짓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한 말 거저 한 말이 아니다. ‘참선과 농사가 한 몸이다.(禪農一体)’라는 말도 거저 나온 게 아니다. 나 알기로 보짱은 ‘입 닥치고 몸 놀려라.’고 다그쳤다. 이것이 묵언수행黙言修行의 지름길이라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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