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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만나다] 공空(8) 언어에 따라 세계는 다르게 보인다언어에 따라 세계는 다르게 보인다
  • 김사업
  • 승인 2015.11.06 11:22
  • 호수 4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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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구語句는 진리 그 자체가 되게 하지 않는다.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는 진실을 잃고,
어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는 깨달을 수 없다. 
      
 
| 부富와 빈貧으로부터의 해방
대부분의 사람은 분필에 대해 늘 짧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는 분필 자체가 짧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분필 자체가 짧다는 것은 분필에 고정불변의 ‘짧다’라는 자성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다. 분필에는 어떠한 자성도 없다. 분필은 대나무보다는 짧지만, 호박씨보다는 길다. 만나는 조건(인연)에 따라 길고 짧음이 생겨날 뿐이지 분필 자체가 길고 짧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필 자체는 ‘부장부단不長不短’, 즉 길다고도 할 수 없고 짧다고도 할 수 없다. 대나무와 비교된 분필을 ‘짧다’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명칭일 뿐 분필 자체가 짧은 것은 결코 아니다.
 
길고 짧음은 만나는 조건에 의해 생겨날 뿐이라는 것을 ‘길고 짧음은 연기緣起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길거나 짧은 고정불변의 뭔가는 없다는 뜻이다. 그 자체로서 성립해 있는 고정불변의 뭔가를 자성自性이라 하며, 그런 자성이 없다는 것을 공空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길고 짧음은 연기할 뿐이다’라는 말과 ‘길고 짧음은 공하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분필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그렇다면 인생은 긴가, 짧은가? 사람들은 ‘인생은 짧다’라는 생각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인생 또한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그냥 그것이다. 수명이 40세라면 그때까지 열심히 잘 살면 되는 것이고, 80세라도 마찬가지다. 길고 짧음이 없는 것에 대해 짧다고 서러워하거나 길다고 좋아하면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서럽거나 좋다는 생각에 마음을 빼앗겨 지금 바로 눈앞의 일을 놓쳐 버리기 때문에 후회와 고苦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선사들은 다음과 같이 엄하게 경고한다. 목마를 때 샘을 파면 이미 늦다. 평소에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찾아왔을 때, 끓는 물에 떨어진 게가 수족을 퍼덕이며 발버둥 치듯이 눈앞이 아뜩하고 정신이 갈팡질팡하여 참으로 괴로울 것이다. 그때 후회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건강하고 여유로울 때 준비해 두어야 급할 때 쓸모가 있다.
 
질문을 하나 더 해 보자. 당신은 부자인가, 가난한 사람인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도 연기한 것이고 공한 것이다. 어떤 조건ㆍ기준에 따라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나누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설마 1인당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자신의 빈부를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빈부를 남이 정한 기준으로 결정해서는 해탈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비하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에 쪼들린다고 하지만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도 무수히 많다. 그들에 비하면 그는 부자다. 빈부를 나누는 어느 하나의 기준에만 매달리지 않는다면, 그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사실 우리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아니다. 부와 가난, 어디에도 물들어 있지 않은 대자유인, 이것이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우리의 원래 모습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아니건만, 분필을 늘 짧은 것으로 보듯이 우리는 자신을 ‘부자다’ 또는 ‘가난하다’로 고정시켜 버린다. 부자와 가난한 자 양쪽 어디로든 고정시켜 버리면 장애가 따라붙는다. 부자는 부자의 대우를 받아야만 만족한다. 부자라는 생각만 없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대접이나 말에도 그는 상처 받는다. 자신보다 더 큰 부자를 만나면 기가 죽거나 시기심이 발동하기도 한다. 반면에, 자신이 늘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매사에 당당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사회에 대해 과도한 불만을 품을 확률이 높다. 
 
부자라는 생각, 가난하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야말로 이와 같은 장애에서 벗어난 자유인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다. 그는 빈부 어느 쪽에도 붙들림이 없는 중도中道를 산다. 
 
당나라 말의 유명한 선승 조주(趙州從諗, 778-897) 선사는 젊은 나이에 이미 대오했으나, 나이 육십에 행각에 나서 80세가 될 때까지 약 20년 동안 각지의 선승들을 찾아다니며 선문답을 나누었다. 행각을 마친 80세의 노승 조주 선사는 처음으로 한 절의 주지가 되었다. 그 절이 바로 하북성 조주에 있는 관음원이었다. 관음원, 지금은 백림선사栢林禪寺라 불리며 웅대한 가람을 갖춘 하북성 불교의 중심지이지만, 당시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절이었다.
 
관음원 시절, 조주 선사의 가사는 낡아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을 뿐이었고, 잠자리는 낡은 갈대 돗자리에 목침 하나, 덮을 이불도 변변찮았다. 좌선할 때 앉는 의자의 다리 하나가 부러지자 그 자리에 타다 남은 땔감 나무를 새끼로 묶어 사용했다. 하북의 실력자 연왕燕王 이극용과 조왕趙王 왕용이 조주 선사에 귀의하여 극진히 모셨으나, 40년 주지하는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시주를 청하는 편지 한 통 보낸 일이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궁핍의 한가운데에서 살았을지 모르나, 그는 자신의 빈부를 남의 기준에 내맡기지 않고 부와 빈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본래의 모습대로 살았다. 그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그의 법어 하나를 소개한다. 수행자라면 잊지 말아야 할 금언이다. 
 
문제만 삼지 않으면 번뇌는 없다. … … 오직 스무 해고 서른 해고 고요히 앉아서 참구하라. 그래도 깨닫지 못하면 내 머리를 베어라. 
 
 
| 언어 이전에는 ‘나’가 없었다 
공사상을 체계화시킨 용수는 『중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自性)와 타(他性), 유有와 무無를 보는 자들은 부처의 가르침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진리이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내가 있다. 절대로 ‘나’가 아닌 ‘남’도 있다.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는 길다와 짧다, 부와 가난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요지부동의 그것들이 있다. 
 
요지부동의 ‘나와 남’ ‘장長과 단短’ ‘부와 빈’의 카테고리에 갇혀 고정불변의 그 둘을, 다시 말해 자성으로서의 그 둘을 보는 자가 용수가 말한 ‘자와 타, 유와 무를 보는 자’이다. 이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온갖 갈등과 번민, 고통을 겪는다. 도대체 왜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를 살지 못하는가?
 
용수에 의하면 그 근본 원인은 희론(戱論, prapañca)에 있다. 희론이란 ‘말(언어)에 의한 대상의 개념화’ 또는 ‘말이나 개념 그 자체’를 가리킨다. 이것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말이 우리의 인식과 사고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부터 알아보자.
 
언어학자 이케가미 요시히코(池上嘉彦)는 『의미의 세계』라는 저서에서 실어증失語症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내용을 재구성해서 소개한다. 실어증이라는 질환은 대뇌 가운데 언어 기능을 담당하는 곳에 손상이나 질환이 생겨서 일어나는 언어장애로서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사물을 표현해야 할 말을 잊어버린 환자에 관한 것이다. 
 
이 증상의 환자들에게 여러 색깔의 카드를 보여 주고 서로 비슷한 색깔끼리 모아서 분류해 보라고 했다. 문제를 간단히 하기 위해 ‘짙은 빨강’ ‘옅은 빨강’ ‘짙은 파랑’ ‘옅은 파랑’의 4장의 카드만 있었다고 하자. 
 
보통의 사람이라면 대개 ‘짙은 빨강’과 ‘옅은 빨강’을 한 그룹으로 모으고, ‘짙은 파랑’과 ‘옅은 파랑’을 또 한 그룹으로 모을 것이다. 그런데 ‘빨강’과 ‘파랑’, ‘짙다’와 ‘옅다’와 같은 말을 잊어버려 그런 말들이 없는 상태에 있는 이 실어증 증세의 사람들은 숫제 분류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4장의 카드 모두가 서로 다른 색깔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엄밀히 말하면 실어증 환자들의 반응이 맞다. 4장의 카드는 모두 다른 색깔이고 따라서 서로 비슷한 색깔의 카드끼리 분류할 수 없다. 그런데도 정상인은 4장의 카드를 위와 같이 두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빨강’과 ‘파랑’이라는 말에 의존하기에 가능하다. 서로 구분되어 별개로 있는 ‘빨강’과 ‘파랑’이라는 말 때문에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정상인은 4장의 카드 중 2장의 카드에는 ‘빨강’이라는 공통된 이름을 붙일 수 있기에 한 묶음으로 만들고, 나머지 2장의 카드에는 ‘파랑’이라는 공통된 이름을 붙일 수 있기에 또 한 묶음을 만든다. 실어증 환자들에게는 이러한 말들이 없기 때문에 분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케가미가 소개한 위의 실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이것과 저것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구분하여 분류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와 무관하게 ‘말의 차이’ 또는 ‘개념의 차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에 따라 보이는 세상도 달라지게 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정상인과 실어증 환자는 다른 세상에 산다. 전자는 서로 유사한 색상끼리 두 그룹으로 분류된 세계에 살고, 후자는 유사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색상의 세계에 산다. 이 모든 것이 순전히 말(개념)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나와 남을 구분하여 나누는 것도 ‘있는 그대로’와는 무관하게 나와 남이라는 말의 차이와 구분에 따른 것이다. 긴 것과 짧은 것으로 나누고, 부자와 가난한 자로 분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말(개념)들이 없으면 구분할 수 없고 나눌 수 없다.
 
말에 의해 세상이 구분되고 달리 보이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보이는 대로 세상 자체가 원래 그렇다고 생각한다. ‘길다’라는 말에 의해 짧은 것과 구분된 긴 것으로 보일 뿐인데도 실제로 그것 자체가 길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고 믿는다. 지금 나에게 인식되는 세계가 말에 의해 건립된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인식되는 그대로 확고부동한 진실의 세계라고 믿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이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보자.
 
“댁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쉽게 “이 아무개입니다”라고 답한다. “당신은 진정 이 아무개입니까?”라고 또 물으면 눈치가 빠른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아무개든, 홍길동이든 이름은 상관없어요. ‘나’에게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니까.” 이 대답은 이름을 무엇이라고 붙이든 ‘나’는 이름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 ‘나’에 어떤 이름을 붙이든 ‘나’는 변하지 않는 동일물로서 이름의 배후에 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착각이다. 언어(이름) 이전에는 ‘나’가 없었다. 언어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동일물로서 늘 존재하는 ‘나’가 있다면 그것은 자성에 해당한다. 
 
불교 교리를 포함하여 현대 언어학과 철학에서 이룬 성과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는 나라는 말에 의해 생겨난 개념에 불과할 뿐이다. ‘나’가 이름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이름에 의해서 비로소 ‘나’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말이 없다면 ‘나’도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우리는 나비와 나방을 구분하고 있으며, 이 둘이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한 곤충으로 인식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말에는 나비와 나방이라는 단어가 서로 구분되어 별도로 있기 때문이고, 프랑스어에서는 이 둘이 모두 ‘빠삐용’이라는 말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의 세계, 언어 이전의 세계는 아무런 구분이 없다. 어떤 것을 표현하는 말이 있어야 비로소 그것은 다른 것과 구분되어 존재하게 된다. 나방과 구분된 나비가 존재하게 된 것은 원래부터 나비라는 독립된 존재(이것이 곧 자성이다)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비라는 말이 생기고, 이 말과 나비 이외의 다른 말과의 차이에 의해서 나비는 존재하게 된 것이다. 순전히 말과 말 상호 간의 차이와 구별에 의해 사물은 구분되고 존재하는 것이지, 원래부터 그 사물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말이 어떠한가에 따라 세계는 다르게 보인다.
나비라는 말 이전에는 나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지금 나비로 불리는 그것은 그때도 있었을 것 아니냐고 아직도 미심쩍어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그것은 나비가 아니었고 나비는 없었다. 그 의문은 나비라는 말로 이미 나비를 엄연히 인식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역으로 추정한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언어는 본래부터 있던 것을 그대로 나타내는 거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언어대로 보이게 하는 요술쟁이다. 따라서 언어가 보여 주는 그대로를 진실이라고 믿고 집착하면 큰 오류를 범한다. 원래부터 꽃인 꽃은 없다. 꽃으로 부를 때에만 그것은 꽃이 된다. “짜증난다”라고 할 때에만 그것은 짜증나는 일이 되고, “가난하다”라고 할 때에만 당신은 가난한 사람이 된다. 
 
‘부자다’ ‘가난한 사람이다’, 이 두 말에서 동시에 해방되어 보라. ‘길다’ ‘짧다’, 이 두 말에서 한꺼번에 해방되어 보라. ‘나다’ ‘너다’, 이 두 말로부터도. 말에 주저앉으면 자유가 묶인다. 화두 들고 좌선하는 선禪 수행의 과정은 모든 언어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매경한고梅經寒苦, 발청향發淸香’, 매화는 혹한의 고통을 거쳐 맑은 향기를 발한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위의 두 사람은 전문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2001년 함께 대학 강단을 떠나 남해안의 오곡도로 들어갔다. 이후 세계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면서 수행했으며, 2003년부터는 간화선 수행에만 전념하여 일본 임제종 대본산 향악사의 다이호(大峰) 방장 스님 지도로 900여 회에 이르는 독참을 통해 피나는 선문답을 나누며 수행해 왔다. 간화선 수행 전문도량 ‘오곡도 명상수련원’(www.ogokdo.net)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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