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를 수행처로 개조하는 데는 많은 자재가 필요했다. 육지에서 자재를 구입해 섬의 해안까지 배로 운반한 다음, 일일이 좁고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서 사람의 힘으로 수행처까지 날라야 했다. 대도시에서 태어나 삶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낸 나(김사업)는 난생 처음 지게를 졌다.
| 대학에서는 교수, 지게를 질 때는 지게꾼
시멘트 한 포대가 40킬로그램이었고, 모래와 자갈도 한 포대에 40킬로그램이었다. 40킬로그램 자재를 수행처까지 지게로 져서 옮겨 놓고 다시 해안의 원위치로 돌아가는 데 약 1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오전과 오후 각각 4차례씩, 하루 8번을 날랐다. 1주일 내내 하루 8번을 날랐던 적도 많았고, 생필품 등 필요한 물품은 수시로 날라야 했다. 한여름 땡볕에도, 비 오는 날에도 지게를 져야 할 일이 있으면 졌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지게를 지고 오르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을 했다. ‘야! 나도 대단한 사람이다. 교수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렇게 지게를 지다니.’ 대학에서 연기・무자성・공을 가르쳤고 그것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한다는 평도 들었던 나였지만, 연기・무자성・공과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나는 교수다’, ‘나는 사장이다’, ‘나는 일용직 근로자다’ 등의 생각을 항상 품고 산다. 그래서 ‘나는 교수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은 교수라고 믿고 거기에 맞는 대접을 받기 바란다.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을 때는 화를 내거나, 부당하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준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교수’라면 그 교수는 자성이고, 실체다. 자성과 그 동의어인 실체란 쉽게 말해 ‘고정된 것’ ‘정해진 것’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교수’라는 생각에서 ‘교수’는 늘 고정된 것이고 정해진 것이다. 자성과 실체는 착각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없다는 것이 연기이며 공이다.
‘언제 어디서나 교수’라고 고집하는 것은 마치 컵에 들어가든 바가지에 들어가든 전혀 그 모양이 바뀌지 않는 ‘특정 모양의 물’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물은 그 어디에도 없다. 물은 연기와 공, 다시 말해 진리 그대로 움직인다. 컵에 들어가면 100퍼센트 컵 모양을 하지만, 바가지에 들어가는 순간 100퍼센트 바가지 모양을 한다.
연기・공의 눈으로 보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교수지만, 지게를 질 때는 교수가 아니라 지게꾼이다. 대학이 컵이라면 지게는 바가지다. ‘교수가 지게를 진다’는 생각은 바가지에 들어간 물이 컵 모양을 한 채 꼼짝도 않는다고 억지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바가지에 들어가서도 컵 모양으로 고정된 물이 있다면, 그것을 일러 자성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한 자성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이다.
따라서 ‘교수가 지게를 진다’는 진리와 동떨어진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 어리석은 생각으로 말미암아 교수인 내가 겸손하다느니, 대단하다느니 별의별 잘못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이런 경우의 겸손은 겸손이 아니라 도리어 교만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목마를 때 물을 마시듯이 필요해서 하는 당연한 일을 ‘나는 언제 어디서나 교수’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다.
|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
불변의 자기 자신이 있다는 집착을 불교에서는 ‘아집我執’이라 한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이다’라는 생각은 아집이다. 또한 아상我相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제 지게를 질 때 ‘나는 ○○이다’라는 생각 없이 지게를 지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나는 ○○인데’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그럴 때마다 ‘아니야, 지게를 질 때는 지게꾼일 뿐이야’ 하고 스스로 다짐할지도 모른다. 만약 이러하다면 그것은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집과 아상의 그림자에 붙들려 있다는 징표다.
연기・공・아집・아상에 대해 머리로만 안 사람은 몇 주 후에는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 자신도 모르게 ‘언제 어디서나 나는 ○○이다’라는 생각을 붙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머리로만 이해한 것은 힘이 없다. 조금의 미심쩍음도 없이 완벽히 이해했다 하더라도 내 마음과 몸은 그대로 따라가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숱하게 경험해 오지 않았는가? 머리로 한 이해만으로는 아집과 아상의 불이 완전히 꺼질 수가 없다.
진정 연기・공 그대로 사는 자라면 지게를 질 때는 ‘지게꾼’이라는 생각도 없이 ‘그냥’ 지게만 진다. 여기에서 ‘그냥’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이 ‘그냥’을 선禪에서는 ‘무심無心’이라고 표현한다. 무심이란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니다. 무심의 상태에서는 ‘교수’라는 생각도 ‘지게꾼’이라는 생각도, ‘싫다’ ‘좋다’ 하는 분별 등 일체의 잡생각이 없다. 또한 그 대가로 무언가를 바라는 욕심도 없다. 일체의 잡생각과 욕심 없이 지금 눈앞의 일에 온전히 몰두하고 있는 상태를 ‘무심’이라고 한다.
어떤 일을 무심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연기・공을 깨달은 사람이다. 머리로만 안 자가 아니라 온 존재로 깨달은 사람이다. 머리로만 아는 것과 온 존재로 깨닫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선은 온 존재로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산들바람이 불어도, 폭풍이 불어도 버들은 바람 따라 흔들릴 뿐 군소리가 없다. 싫은 바람도 있으련만 그냥 흔들릴 뿐이다. 그래서 밑동과 뿌리는 늘 고요하다. 버들과 달리 우리 마음은 언제나 군소리가 많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군소리와 이에 대한 반응으로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고 산다. “나는 ○○인데” 등의 군소리를 멈출 수 있다면 지금의 고통이 얼마나 많이 줄어들까? 군소리가 없었다면 지금의 고통은 처음부터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군소리가 멈출 때 몸은 분주해도 마음은 고요하다.
| 요강인가, 양념 단지인가?
우리의 어리석음은 자기 자신을 고정된 것(자성)으로 보는 ‘아집’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존재에 대해서도 ‘고정불변의 그것’, 즉 자성으로 본다. 사물과 현상에 불변의 자성이 있다고 보고 언제나 ‘고정불변의 그것’으로 집착하는 것을 ‘법집法執’이라 부른다. 불교에서는 모든 집착을 아집과 법집, 이 둘로 분류한다. 이번에는 법집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다음의 이야기부터 들어 보자.
거실 한쪽 구석,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조그만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항아리는 시어머니가 젊은 시절에 사용하던 요강이었다. 이것은 이 집 며느리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생 손자가 그 항아리를 보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에요?” 어머니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응. 양념을 넣어 두는 양념 단지란다.”
며칠 후 며느리가 양념을 보관할 용기를 찾고 있을 때 손자가 거실의 항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에 넣어 두면 되잖아요.” 이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가 기겁을 하며 말했다. “이 녀석아, 요강에다 양념을 넣으면 어떡하니!” 이튿날 소변을 막 가리기 시작한 손녀가 거실에서 갑자기 소변 볼 곳을 찾자, 할머니는 그 항아리를 사용했다. 옆에 있던 손자가 큰일이나 난 것처럼 말했다. “할머니! 양념 단지에다 오줌을 누게 하면 어떡해요!”
거실 한구석에 놓여 있는 저것은 요강인가, 양념 단지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항아리라고만 해야 할까?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정지・고정된 모습이 아니다. 자성・실체가 없는 것이다. 눈앞의 저것은 용변을 보면 요강이지만, 양념을 넣으면 양념 단지다. 흙을 넣고 난초를 키우면 화분이고, 맑은 물을 붓고 금붕어를 살게 하면 어항이다.
저것은 공하여 어떤 것으로도 정해져 있지 않아서 인연 따라 요강이기도 하고 양념 단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언제 어디서나 요강으로만 보고, 손자는 언제 어디서나 양념 단지로만 본다. 저것을 ‘요강’ ‘양념 단지’라는 고정불변의 것, 즉 자성으로 보는 것이다. 지게를 질 때도 교수라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음이다. 할머니와 손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저것은 요강도 아니고 양념 단지도 아닙니다. 항아리일 뿐이죠.” 이 말도 맞지 않다. 까치에게 그것은 항아리가 아니고 둥지이다. 원래는 항아리인데 둥지로 보일 뿐이라고 강변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항아리에 대한 자신의 집착이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원래는 항아리다’라는 생각은 그것의 겉모습이 아무리 변해도 항아리라는 본질은 그대로라는 발상이며, 이러한 발상 자체가 자성에 근거한 사고이다. 연기・공에는 ‘원래의 항아리’란 없다. 까치는 대꾸할 것이다. “둥지를 왜 항아리라고 합니까?”
거실에 있는 저것을 두고 “요강이다” “양념 단지다” “항아리다” “둥지다”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벌이거나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저것은 아무 소리 없이 고요한데 사람들만 쓸데없이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다툼도 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
달마대사가 문제의 저것을 가리키며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요강이라 해도 틀리고, 양념 단지라 해도 틀린다. 무엇이라 해도 틀린다. 뭐라고 부르겠느냐?” 선 수행이 깊어지면 즉답이 나온다.
| 색즉시공과 대사일번大死一番
『반야심경』은 공사상의 핵심을 설하는 경전이다. 거기에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전체를 직역하면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다’가 된다. 이것은 앞 구절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에서 색이 들어간 자리에 ‘수・상・행・식’을 각각 대입해서 읽어도 같은 뜻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이 전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색・수・상・행・식, 즉 오온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오온이다’가 된다.
여기서 오온이란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오온’이란 말 대신에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다른 용어를 대입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적 사고와 삶을 영위해 가는 데 보다 실질적이며 구체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바꾸어 보면 된다. “교수는 곧 공이며, 공은 곧 교수이다.” “요강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요강이다.”
“요강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요강이다”에서 우선 앞부분 “요강은 곧 공이다”부터 살펴보자. 이미 설명한 대로 요강이라 불리는 것에는 ‘요강’이라는 고정불변의 자성이 없다. 이러한 자성이 없는 것을 ‘공’이라고 하므로 “요강은 곧 공이다”. “요강은 절대로 요강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요강은 곧 공이다”는 말은 “요강은 요강이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요강은 곧 공이다”라는 것이 요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며 진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위 이야기 속의 할머니는 아마 평생 동안 요강은 그 자체가 요강인 것으로 믿고 살 것이다. 그런 할머니에게 “요강은 곧 공이다”, 쉽게 말해 “요강은 요강이 아니다”라는 한마디는 요강에 대한 할머니의 기존 생각을 송두리째 흔드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색즉시공’ 즉 ‘색은 곧 공이다’에서 ‘색’을 오온의 줄임말로 보면, 이 한마디는 요강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알고 있었던 기존의 모든 것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다. 그러므로 ‘색즉시공’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서 말할 수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당신이 생각해 온 불행, 그것은 사실 불행이 아닙니다.” “당신이 ‘나’라고 믿어 온 그런 ‘나’는 허깨비와 같아요. 당신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무지의 잠에서 깨어나면 그런 ‘나’는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사고방식도 할머니의 그것과 별다를 바가 없다. ‘색즉시공’ 이 한마디에 의해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나와 너 등에 대해 우리들이 철옹성처럼 굳게 지녀 온 생각들이 흔들리고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도 애지중지했던 나와 존재에 대한 믿음과 고집, 다시 말해 아집과 법집은 종식을 고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나’가 육체적 생명은 유지한 채 통째로 죽는 것과 다름없다. 이와 같은 죽음을 선禪에서는 ‘대사大死’, 즉 ‘크게 죽는다’라고 표현한다.
‘대사大死’는 타인에 의해 죽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자진해서 움켜쥐고 있던 모든 것을 철저히 놓아 버리는 것이다. 만사를 잊고 백지상태로 되는 것이다. ‘대사일번大死一番’이란 한번 그렇게 철저히 죽는 것을 말한다. 깨달은 사람에게 ‘색은 곧 공이다’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직 눈뜨지 못한 우리에게 ‘색은 곧 공이다’라는 진리가 실현되려면 ‘대사일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자신의 바람과 목적부터 백지화되어야 ‘색즉시공’은 시작된다. 그런데 자신의 바람과 목적은 그대로 두고 도리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상대나 관습을 부정하려고 ‘색즉시공’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색즉시공’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린 태도다. 우리의 끝없는 욕망과 간교한 생각은 이렇게 ‘색즉시공’조차도 자신의 하수인으로 삼을지 모른다. 이것은 독사를 잘못 잡은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니 경계해야 한다. ‘대사일번’은 내가 크게 죽는 것이지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장휘옥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하여 석사 과정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화엄 사상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불교학개론 강의실 1, 2』, 『무문관 참구』(공저), 『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없이』 등 10여 권의 책을 썼으며, 『중국불교사』 등을 번역했다.
김사업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동국대 불교학과로 학사 편입한 뒤, 유식 사상을 전공으로 석사・박사 학위 취득. 일본에 유학하여 교토대학(京都大學)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로 재직. 『길을 걷는 자, 너는 누구냐』(공저), 『무문관 참구』(공저), 「유식설에서의 연기 해석」, 「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 비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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