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네 삶의 주인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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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네 삶의 주인이 되라!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12.3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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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무거운 짐을 싣고 가던 당나귀가 개울을 건너다가 그만 물속에 빠졌다. 당나귀는 소금이 녹아 버려 짐이 가벼워진 것을 알았다. 이후로 당나귀가 개울에서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 계속 넘어진다는 사실을 눈치 챈 소금장수는 당나귀를 골탕 먹이려고 소금대신 솜을 싣는다. 결국 당나귀는 물에 젖은 솜,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이 교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얕은 꾀를 쓰지 말자, 잔머리를 굴리지 말자…. 그 답은 천편일률적이다. 그 이상의 답은 나오지 않는다. 왜 학생들이 모두 권력자의 입장, 사용자의 입장, 갑의 입장을 대변하는 답을 하는 것인가. 차라투스트라가 교실에 있었다면 이런 답을 했을 것이다. “짐을 실을 때는 내용물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이면 넘어지고 솜이면 그냥 건너는 거죠.” 그거 좋다! 당나귀답다.

| 초인超人에게는 피곤하게 끌고 다녀야할 그림자가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차라투스트라는 서른이 되었을 때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라고 시작되는, 니체의 철학 같기도 하고 문학 같기도 한 종잡을 수 없는 책이다. 니체의 글은 분류되기를 거부한다. 분류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이고 규약이다. 그 규약들은 이래라 저래라 복종을 강요한다. 복종은 무겁고 피곤하다. 도대체가 재미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 규약들을 함부로 걷어차지 않는다. 심지어는 신주 받들 듯 떠받들기도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나 나한을 만나면 조사나 나한을 죽인다.”는 임제臨濟 선사 같은 맹호의 기상이 우리에게는 없다. 먹고 사는 일은 엄숙한 일이라며 스스로의 소시민적인 삶을 변호하면서, 눈물과 치욕을 지불하면서, 피곤함을 견디며 하루를 살아간다. 그것이 범부凡夫들의 삶이고 니체 식으로 말하면 노예들의 삶이다. 그것은 무엇엔가 질질 끌려가는 삶이다. 범부들은 세상이 이런 식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하면 고분고분 그 주문에 응한다. 니체는 다르다. 자기 식으로 말하고 자기 식으로 쓴다. 장르의 요청, 그런 거 안중에도 없다. 왜 내가 피곤한 규약에 얽매이겠느냐, 나는 내 안의 리듬, 내 안의 폭포, 내 안의 외침을 기록한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문체를 관통하는 초인의 기상이다. 일체의 거침도 없고 걸림도 없다.

노예가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라면 초인超人은 피곤한 무게를 걷어내버린 사람, 홀가분한 사람이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소요逍遙의 정신을 아는 진인眞人이다. 신이 무거우면 신마저 내려놓는 사람이 초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을 내려놓은 자리에 인간을 내세운다. 세상이 요구하는 피곤한 규약에 얽매인 자가 아닌, 목불木佛을 불쏘시개로 던져 버리는 대자유인, 초인을 내세운다. 초인에게는 피곤하게 끌고 다녀야할 그림자가 없다. 그는 대낮의 정신, 위대한 정오의 영혼이다. 초인은 말한다. “너희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더없이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경멸의 시간이다. 너희들의 행복이, 그와 마찬가지로 너희들의 이성과 덕이 역겹게 느껴지는 바로 그때 말이다.” 초인은 인간을 세상을 오염시키는 더러운 강물과 피부병에 비유하기도 한다.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 ‘가이아’로 정의했고 어떤 이는 인간은 가이아에게 있어 암세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비한다면 니체의 표현은 차라리 겸손하다. 소유, 소유, 또 소유를 외치는 인간, 성장, 성장, 또 성장을 부르짖는 인간을 경멸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인간에게 얹어진 무거운 짐을 덜어낼 수 있겠는가. 바랑 하나 짊어지고 가기에는 우리들의 소유는 지나치게 많다. 초인은 말한다. “인간은 일종의 웃음거리 아니면 일종의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일 뿐이다.”라고. 뱁새가 깊은 숲에 깃들어도 한 개의 나뭇가지를 의지할 뿐이고 두더지가 황하黃河 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는 데 불과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도시의 저 거대하고 호화롭고 기름진 것들을 두고 초인은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과 경멸을 느낄 것이다. 경멸은 과거와 단호하게 이별하는 정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나 나한을 만나면 조사나 나한을 죽이는 매서운 독수리의 기상이다. 초인은 말한다. “너희들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벌레이고, 어떤 원숭이보다 더 철저한 원숭이다.”라고. 벌레는 갉아먹고 원숭이는 흉내 낸다. 흉내는 노예들의 놀이다. 노예들은 주인을 모방한다. 흉내엔 자기가 없다. 자기가 없으니 저항이 없다. 

| 니체가 말하는 정신의 세 가지 단계
니체는 정신의 세 가지 단계에 대해 말한다.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처음 낙타가 되고, 낙타에게서 사자, 마침내 사자에게서 어린아이가 되는 정신의 변신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낙타의 삶은 세상의 율법에 고분고분한 삶, 굶주림과 추위와 갈증을 묵묵히 견뎌내는 삶이다. 낙타의 희생정신을 찬양하는 이들도 있다. 세상은 낙타의 근면과 인내에 두터운 보상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낙타는 한없이 피로하다. 자기가 없는 낙타의 삶은 건조하고 무겁고 피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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