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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11.0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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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화쟁론에서 배우는 대화의 철학

| 진보와 보수, 철저한 이분법에서 벗어나기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한 사회 혹은 국가의 나아갈 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회적 합의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합의는 결과로서의 ‘일치된 의견’이 아니라 합의에 이르는 절차이자 그 과정을 말한다. 다시 말해 한 사회에 단 하나의 의견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다. 투표라든지 다수결이 민주적 제도로서 의미를 갖는 것도 그 과정의 선함이 있는 것이지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결정이 늘 선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투표나 다수결은 한 사회의 ‘최종적 선택’이어야 한다. 투표는 파국을 막기 위한 마지막 제도적 장치이지 모든 것을 투표로만 결정해야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투표 이전에 다양한 방식과 경로를 통해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면서 사회적 대타협을 만들어 갈 수 있어야 바람직한 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시민의 총명함과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이 시민의 지혜다. 이견은 곧바로 분열로 이어진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자는 곧 타도의 대상이며 나의 적이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의견의 불일치가 곧 분열로 이어지는 사회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강정마을, 밀양 그리고 대북문제 등 여러 다른 사회적 주요 현안을 두고 국민들은 둘로 쪼개져버린다. 용액에 담그면 파란색 혹은 빨간색으로 변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민생을 얘기하면 보수가 되고 특별법을 얘기하면 진보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북한문제도 마찬가지다. 대북교류를 강조하는 순간 나는 ‘퍼주기’를 찬성하는 사람이 되고 심지어 ‘종북주의자’로 낙인찍힌다. 그런가 하면 북한인권문제를 얘기하면 ‘보수주의자’이자 ‘흡수통일론자’로 되어 버린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단순하게 갈라버리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용어들이 많이 있다. 안보를 얘기하면 보수고 환경을 얘기하면 진보다. 철저한 이분법이다. 민생과 특별법이 둘 다 중요한 문제이며 안보와 환경 둘 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가치로서 양쪽 모두를 살리는 방향에서 타협과 절충은 가능하지 않은 것인가? 양자택일의 선택지만이 주어진 가운데 나만이 옳고 저들은 그르다는 진영 논리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거나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여기에는 진영 논리와 지역성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존재를 한국 사회에서 다 몰아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기대할 것은 곧 시민의 지혜일 수밖에 없다. 

| 모두 ‘옳다’ 혹은 모두 ‘틀렸다’
원효의 화쟁론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시민의 지혜를 만들어 가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화쟁론은 사회학적 혹은 정치학적 이론이 아니다. 화쟁론은 7세기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교학적인 논쟁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하는 일종의 경전해석학이다. 그렇지만 서로 상충되고 모순처럼 보이는 ‘백가의 이쟁(百家之異諍)들을 불설佛說의 관점으로 조화시키고자 하는 원효의 화쟁론은 오늘의 우리 사회의 문제와 결코 무관한 이론이 아니다. 화쟁론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대화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화쟁론을 통해 서로 다른 주장들이 결코 모순되거나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원효가 들고 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예화에서 잘 드러난다. 코끼리 전모를 다 볼 수 없는 장님들은 각자가 만지고 있는 부분이 코끼리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코끼리가 “벽과 같다”고 하며 또 다른 이는 “기둥과 같다”고 한다. 그야말로 ‘백가의 이쟁’이지만 어느 한 사람의 장님도 자신의 주장을 굽힐 수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자신이 손으로 직접 코끼리를 만진 결과로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원효는 “모두 옳다(개시, 皆是)”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어느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코끼리 아닌 다른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효는 또한 “모두 틀렸다(개비, 皆非)”고 한다. 어느 누구도 코끼리의 전모를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皆)”라고 하는 동시적 상황이다. 나의 옮음이 저들의 틀림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저들이 옳다고 해서 반드시 내가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나의 옳음과 저들의 옳음이 다를 뿐이다. 화쟁론이 일종의 대화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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