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고도 눈물겨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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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도 눈물겨운 죽음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7.0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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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

| 바틀비의 지독한 무위無爲 
소설 『백경白鯨』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대표작이다. 그는 유복한 집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가 파산하고 죽으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배를 타야 했다. 상선의 선원과 군함의 수병으로서 태평양을 자주 오간 경험은, 그가 남긴 다양한 해양모험담의 소재로 쌓였다. 사실 지금이야 고전으로 통하지만, 멜빌의 생전에 『백경』은 초판 3,000부도 빼지 못할 만큼 인기가 없었다는 전언이다. 
『필경사筆耕士 바틀비Bartleby』는 멜빌이 끼니라도 이으려 어느 잡지사에 사정사정해 싣게 된 단편이다. 깡마르고 창백한 용모를 지닌 바틀비의 말로는 빈곤과 실패에 시달리는 작가의 애환을 담은 분신으로 보인다.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돼 각종 법률문서를 베껴 쓰는 업무를 수행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드러누워 버린다. 
태업에 돌입한 바틀비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란 문장을 입에 달고 살았다. 상관의 정당한 지시를 번번이 거부하며 직장의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인간적이고 관대했던, 무엇보다 평온한 일상을 흩트리고 싶지 않았던 변호사가 최선을 다해 달래고 설득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결국 참다못해 해고 통보를 내리는데, 바틀비는 무슨 배짱인지 해고마저 인정하지 않으며 책상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끝내 ‘영업방해’ 혐의로 구치소에 갇히게 된 희대의 막무가내는 마지막까지 벽창우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식사도 “안 하는 편을 택하면서” 기어이 굶어죽은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한 대가는 쓸쓸하고 비참한 죽음이었다. 그의 지독한 무위無爲는 스스로를 혹사시키지 않고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읽힌다.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흔연히 내던진 뒤, 살아야 한다는 최후의 불안까지 제거해낸 용기는 끔찍하지만 일견 숙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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