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자유’의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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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자유’의 종교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5.2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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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의 문화와 출가의 문화

| ‘집’, 돌아가야 할 곳인가  떠나야 할 곳인가
『오디세이아』는 인류가 정주문화를 시작한 이래 집을 ‘떠남’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농사를 짓기 위해 집을 잠시 떠나더라도, 또 장사를 하기 위해 집을 몇 해씩 떠나더라도 늘 인간들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집’을 삶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고대 동아시아의 유교적 세계관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신修身과 제가齊家 그리고 치국治國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집’은 늘 세계의 중심이다. 군신의 관계가 부자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효와 충이 동일시 될 수 있는 것도 결국 ‘집’이 세계의 출발점이자 완성태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등장은 ‘집’에 대한 인류의 생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문명사적 사건이었다. 청년 싯다르타에게 ‘집’은 돌아갈 곳이 아니라 떠나야 할 곳이었다. 처자식은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장애’였다. 집을 떠나고자 하였던 것은 싯다르타만이 아니었다. 당시 인도의 많은 젊은이들이 집을 떠났다. 그들을 사문沙門 즉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싯다르타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추구하였던 것은 진정한 자아의 실현이었다. 이를 위해 ‘집’을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집’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문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세기경』에는 ‘집’을 바라보는 불교적 입장의 문명관이 잘 드러나 있다. 이에 따르면 ‘집’이란 개인의 욕망을 은폐하는 곳이자 재화를 축적하는 장소다. 요컨대 집은, 당시 사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욕망의 ‘발전소’이자 욕망을 재생산하는 장소였다. 집 그리고 가족이란 자신을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게 되는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 나아가 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참된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곳이기도 하다. 
『성경』의 「마태복음」에서 “나보다 자기 부모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적합하지 않으며…”라고 하는 예수의 언급 또한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불교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의 경우는 보편적 사랑의 실천을 위한 ‘출가’를 정신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수행의 과정으로 제도화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집’을 ‘돌아가야 할 곳’으로 생각하는 문화와 ‘떠나야 할 곳’으로 생각하는 문화는 인류의 문명사를 통해 늘 일정한 대립관계를 유지해왔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귀환의 문화’가 늘 주류였고, ‘출가의 문화’는 늘 소수에 속하는 비주류의 문화였다. ‘집’이 신체적·정신적 쉼터의 역할을 지나쳐 욕망의 근거지이자 탐욕의 은신처가 될 때, 출가의 문화는 우리에게 자아실현의 진정한 의미를 각성하게 해주었다. 
불교가 동아시아문화권에서 늘 불온시 되었던 것도 불교에 내재되어 있는 ‘출가’라고 하는 지향점 때문이었다. 흔히 인류의 문명을 유목민의 이주문화와 농경민의 정착문화로 나누고 있는데, 여기에 숨어 있는 문명적 코드가 바로 ‘출가의 문화’와 ‘귀환의 문화’다. 이주와 정착은 단지 생산 수단과 방법의 차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자아실현의 장소로서 ‘집’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서로 다른 입장이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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