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하게 수수처럼 커라 발원을 넣은 수수부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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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탈하게 수수처럼 커라 발원을 넣은 수수부꾸미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2.07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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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영선사 사찰음식

저물녘 창밖으로 겨울해가 아스라하다. 온기를 담은 밥상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한상 가득 차려진 음식은 왼쪽 위부터 단호박마찜, 무조림, 자색고구마전과 연근전, 우엉과 연근구이, 동치미와 김치, 재피무침, 오미자더덕구이, 땅콩조림과 버섯잡채, 잡곡밥, 송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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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길에서 배가 고파 들어간 허름한 식당이 있었다. 음식을 하는 어머니와 그것을 나르는 아들이 꾸려가는 탁자가 세 개뿐인 작은 식당. 밥을 시키자 설멍해 보이는 아들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제 어머니는 밥 남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셔서 미리 밥을 해두지 않아요. 주문이 들어오고 나서야 밥을 안치니 30분은 기다려야 합니다.” 밥장수가 밥이 없다니 전장에 나간 장수가 칼이 없는 셈이다. 허나 곰곰 생각해 보니 그녀야말로 진정한 밥장수가 아닐까 싶었다. 밥을 귀히 여기며 밥 내어주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으니 그이들의 세상살이도 그 밥과 같지 않을까. 잘 벼린 검을 쥔 장수는 멀리까지 내다볼 여유와 깊이가 있을 터. 창밖에 소슬히 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밥 짓는 냄새를 맡으며, 사는 내내 그 밥맛을 잊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먹어라

법송 스님이 발효차를 내어주시며 통도사 공양간에 적혀 있었다는 시 한 편을 읊어주신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먹어라. / 봄에서 한여름 가을까지 / 그 여러 날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 쌀 곡식 채소가 아닌가. /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 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움이 들겠느냐. / 사람이 고마움을 모르면 /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요새 가장 힘든 게 먹는 일이다. 먹거리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무엇을 먹어도 마땅치 않고 그러니 음식에 대한 고마움은 더더욱 없고 그러니 버려지는 음식에 대해서 미안함도 없다. 밖에 나가면 그러려니 속는 셈치고 밥을 사먹으니 밥을 파는 사람도 눈속임으로 만든 음식을 플라스틱 접시에 담아 상에 던져준다. 그럼 또 그 또한 그러려니 하고 군말 없이 먹는다. 먹는 일이 이 지경이다. 그러니 사는 일도 이 지경이다. 그 무엇도 바로 보지 못하고 두루뭉술하게 연명延命하는 것. 허나 이것은 쌀과 채소와 고기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 귀한 것을 천하게 만든 것은 인간이다. 믿고 먹을 것이 없어 아등바등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은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먹을 줄 모르기에 벌어진 가혹한 폐단이다.

“저는 콩나물 대가리 하나 버리는 것도 싫어해요. 인간의 도리를 안다면 그것을 어떻게 버리겠어요.”

본래 귀한 것이다. 그러니 밥 따로 씹고 반찬 따로 씹어 그 음식의 맛을 알며 천천히 먹으라 하신다. 그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고마운 마음을 채우기 위해선 조금만 부지런하면 된단다.

“사람들한테 채식하라거나 육식하라거나 하는 말은 안 해요. 소고기를 먹으면서 소의 고마움을 안다면 그 마음이 좋아지지 않겠어요?”

밥을 버리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 그것은 인간의 도리다. 음식의 고마움을 모른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절에서 먹는 밥은 그 맛이 어떠하든 밥의 귀함을 일깨운다. 매일 먹어 천히 여겨진 밥이 이토록 귀한 밥이 된다. 그러니 귀한 ‘내’가 된다.

 
| 3대째 내려오는 정성의 맛

영선사의 음식에는 3대째 내려오는 손맛이 있다.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맛은 옆집에 살아도 흉내 낼 수가 없다. 게다가 절집의 맛이니 스님들의 원력이 깃든 그 음식을 어찌 쫓을까. 법송 스님은 정성에서부터 시작되는 은사스님의 가르침을 기억한다.

“굉장히 무섭게 가르치셨어요. 제가 공양주로 살 때였는데 한번은 아침상을 보시더니 수저도 안 들고 그냥 나가버리셨어요. 그때는 황당했는데 이제야 그때 왜 그러셨는지 알겠더라고요. 성의 없는 음식이 노여움을 샀던 거예요. 그만큼 정성을 중요시하셨어요.”

음식에는 추억이 깃든다. 아픈 추억이 스며들어 있어 삼켜지지 않는 음식도 있고 즐거운 시절이 떠올라 더 맛있어지는 음식도 있고 몸이 아플 때나 계절이 바뀔 때 생각나는 음식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추억의 음식은 늘 그리운 이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법송 스님과 주지인 현도 스님은 지난 6월에 입적하신 은사스님을 추억하며 계절마다 손수 해주시던 음식을 떠올린다. 봄엔 쑥개떡, 여름엔 홍두깨 수제비, 가을엔 송이밥, 겨울엔 만두.

“가을이면 당신 용돈을 모으셨다가 저희에게 송이밥을 꼭 해주셨어요. 직접 송이를 사고 손질하고 요리해서 송이밥에 송이국에 송이간장을 차려주셨지요.”

은사스님의 그 송이 요리는 돈을 모으면서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돈을 모으고 장을 보면서도 내내 그 송이밥을 먹을 제자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은사스님께서 말씀하신 정성어린 음식이란 바로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그러니 그것은 그저 음식이 아닌 정성이 차려진 게 아니었을까. 아랫사람에게 내어주는 어른의 정성, 도를 닦으려 출가해 먼 길을 가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정성. 그래서 누구나 엄마의 밥이 맛있는 게 아닐까. 음식을 잘 못하는 엄마라도 그 자식들은 그 정성의 맛을 몸으로 아니까. 그래서 외지로 나간 자식들은 늘 엄마의 품이 그립듯 엄마의 밥상이 그리운 게 아닐까. 올 가을 법송 스님이 차려놓은 밥상엔 은사스님께서 끓여주셨던 정성의 송이국이 올랐다. 이미 마음에 향이 퍼지고 몸이 따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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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먹는 밥은 그 맛이 어떠하든 밥의 귀함을 일깨운다. 매일 먹어 천히 여겨진 밥이 이토록 귀한 밥이 된다. 그러니 귀한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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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스님은 채마밭에서 딴 채소도 한두 시간이나 하루이틀 숙성을 시키셨단다. “숙성을 시키면 맛이 부드러워지고 그것을 먹은 사람도 온순해져요. 그러니 사람도 숙성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지요.”

 
| 채소도 숙성시키는 절집의 도리

싱싱한 것, 즉 밭에서 바로 딴 채소나 갓 잡은 생선이 가장 좋은 것인 줄 알고 살았다. 그것을 죽여 바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살아’ 있는 것 같다고 감탄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산’ 것이었다. 영선사 주지 현도 스님은 말씀하신다.

“생것을 먹으면 성격이 급하고 난폭해져요. 되도록 채소도 고기도 숙성시키고 익혀먹는 게 좋아요.”

은사스님은 채마밭에서 딴 채소도 한두 시간이나 하루이틀 숙성을 시키셨단다. 법송 스님은 은사스님의 그런 모습은 수행의 끝에서 나오는 게 아니겠나 하신다. 그리고 숙성을 시키면 부처님 법에 위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채소의 독이 빠지고 맛도 좋아진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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