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따라 마음 따라] 스님, 쿵후 할 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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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따라 마음 따라] 스님, 쿵후 할 줄 아세요?
  • 혜민 스님
  • 승인 2011.11.0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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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승복을 입고 돌아다녀보면, 가끔씩 흑인 꼬마들이 내 앞에서 갑자기 이소룡 흉내를 낸다. 나에게 중국 소림사 스님처럼 쿵후를 할 수 있냐고 물어 보는 듯하다. 그럴 때마다 어설픈 쿵후의 폼을 좀 잡아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무시하고 그 꼬마들 앞을 그냥 지나가야 하는지 살짝 갈등이 온다.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일 경우, 미국 사람들은 내가 한국에서 온 승려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주로 ‘어떤 명상(Meditation)을 하루에 얼마나 하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미국 사람들은 승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Identity)을 명상이라는 수행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미국 아이들과 어른들의 두 가지 반응들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또 통하는 부분이 있다. 승려를 대할 때 쿵후나 명상을 떠올리는 데서 알 수 있듯, 그들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이 하는 행동으로써,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결정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한국에서 가끔 택시를 타면 대개 택시 기사님들은 나를 보고 “스님은 지금 어느 절에 계십니까?” 아니면 “어느 절에서 오셨습니까?”라고 묻는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들조차도 처음 만나면 일차적 통성명 이후에 서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지금 어느 교회 다니세요?” 혹 손에 염주를 차고 있으면 “절에 다니세요? 어느 절 소속이세요?” 우리나라 스님들끼리 처음 만났을 때 하는 질문들 중에도 그 스님의 문중(門中)이 어디인가 하는 물음은 참으로 중요한 관심 대상이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대방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 지금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보다 어떤 그룹에 속해 있는지를 더 중요하다고 느낀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 사람의 행위나 능력에 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 알고 있거나 자주 어울리는 주변 사람들 에서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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