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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법구] 안나푸르나에서내 마음의 법구

지난겨울, 참 오래 벼르던 곳에 다녀왔습니다.

안나푸르나.

더 정확히 말하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입니다. 줄여서 ‘ABC’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저 엄홍길 씨 같은 전문산악인들에게야 산맥의 입구에 불과한 곳이지만, 그저 히말라야의 품에 한번 안겨보려는 저 같은 사람들에겐 꿈의 목표지요. 해발 8,000미터를 넘는 고봉에서 깃발을 흔드는 사람들에게 4,130미터는 시시한 고도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상상만으로도 긴장과 흥분이 교차되고 가슴이 뛰는 높이입니다.

아무튼 저는 그 높고 크고 깊은 산골짜기에서 열 차례의 낮과 밤을 보냈습니다. 그날들 안에는 경인년의 마지막 밤과 신묘년의 첫 아침도 들어있었지요. 말하자면 저의 2011년은 안나푸르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히말라야가 ‘눈[雪]의 다발’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그 백설의 꽃다발 사이로지고 뜨는 해를 보았습니다. 일몰은 장엄했고, 일출은 그윽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장면은 태양의 붉은 기운이 ‘피시 테일(Fish Tail)’을 물들이며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산의 정상이 물고기 꼬리지느러미를 닮았다고 해서 피시 테일이라 불리는 봉우리인데, 본래 이름은 ‘마차푸차레(Machapuchare)’지요. 예기치 않은 순간에 불쑥불쑥 솟구쳐서 그 신령한 얼굴을 내보이는 산입니다. 네팔 사람들은 신들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기는 곳입니다.

이번 안나푸르나 산행의 열흘은 어쩌면 ‘마차푸차레’를 따라 돈 여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입니다. 온종일 몇 산을 넘어 찾아든 산장에서도, 길고긴 골짜기 끝의 숙소에서도 마차푸차레는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산행을 마치고 인간의 마을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보였습니다. 땀범벅에 파김치가 되어 인간의 마을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배웅하고 있었습니다. 고작 당신의 발치에서 놀다가는 주제에 정상에라도 올랐던 것처럼 승리감에 취해 산을 내려오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떠나오는 날 저잣거리에서 다시 한 번 그 봉우리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오체투지의 심정으로 경배하며 우러러보았습니다. 정지해 있는 존재의 무서운 스피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제아무리 빠른 짐승도,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교통수단도 따를 수 없는 대자연의 엄청난 속도를 가늠해보려 애를 썼습니다. 참으로 풀기 힘든 의문이었습니다.
대체, 산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와 앉아 있는 걸까요. 얼마나 오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까요. 문득, 1997년 토함산 아래서 입적하신 월산(月山) 스님의 임종게가 떠올랐습니다.

회회일생(廻廻一生)
미이일보(未移一步)
본래기위(本來其位)
천지이전(天地以前)

평생을 돌고 돌았으나, 한 걸음도 옮긴 바가 없네.
(생각느니) 본래 그 자리는 천지 이전의 것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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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 

윤제림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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