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대해 생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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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해 생각하지 마라
  • 불광출판사
  • 승인 2010.08.3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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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선(禪)과 함께 이러구러

자살과 순국의 근친관계

“저는 온몸이 병들었으니 스님께서 치료해주십시오.” “치료해주지 않겠네.” “어째서 치료해주시지 않으십니까.” “그대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련다.”                                                                 

- 조산본적(曹山本寂), 『조산록』

세상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으로 나뉜다. 알다시피 국법은 비흡연자의 편이다. 새천년과 함께 시작된 금연 정국, 흡연자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는 추세다. 특히 이웃의 제사상에 자기가 정한 대로 감과 배를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비흡연자들에게는, 극우의 눈에 비친 좌파쯤 된다. 악마이거나 최소한 상종 못할 놈이다. 서너 줄의 문장을 쓸 때마다 한 개비씩 태우는 경지에 이르면, 웬만한 비난쯤은 달관하게 된다. 건강에도 해롭고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흉물을 왜 끊지 못하느냔 핀잔은, 불교 신자에게 왜 기독교를 믿지 않느냐고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불교 신자가.
‘의식 이전에 무의식, 이성 이전에 욕망 그것도 성적 욕망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의 핵심이다. 주막의 매상을 올리는 데나 요긴할 법한 음담은, 치열한 논리와 실증을 만나 장엄한 대서사시로 승화됐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에 비견되는 과학사의 혁명은, 어쩌면 담배 덕분이다. 프로이트는 지독한 애연가였다. ‘연구의 자양분’, ‘자기 성찰을 위한 필수적인 자극제’ 그가 담배에 하사한 훈장이다. 가장 아끼던 딸과 손자의 죽음을 겪으며 피웠고, 33번의 구강암 수술을 견디면서 피웠다. 이쯤 되면 전설적 골초와 맞먹는 수준이다. 한 손으론 담배를 빨고 한 손으론 세수를 했다는.
어느새 본능이 되어버린 흡연. 담배의 해악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내칠 엄두를 못 낸다. 과거가 고통스러웠고 현재가 고통스러우며 미래가 고통스러울 걸 알면서도, 쉽사리 삶을 접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금연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시시각각 세파에 시달릴 때마다 주야장천 피워대면서, 목숨을 한 조각씩 태워 없앤다. 발레하고 싶다는 자식 동네 학원 보내다 유학 보내듯, 기어이 파산하고 말리란 걱정. 하긴 언젠간 치르게 될 파산인데, ‘일’의 모양새가 무슨 대수일까 싶다. 한숨이든 심호흡이든 끽연이든, 그저 숨 쉬는 일인데. 자살이든 사고사든 순국이든, 그저 숨이 멎는 건데.
탐구를 위해서도 소통을 위해서도 담배가 필요하다. 눈먼 거북이처럼 부유하는 삶에 괄목(刮目)할 만한 의미를 새기고 싶다는 생각이, 의미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흡연을 재촉한다. 자고로 글쓰기란 노동 집약적 막일이다. 원고료 말고는 부가가치를 바라기 어려운 1차 산업이다. 뭔가 그럴듯한 발상을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다가 몸만 상할 수 있다. 결승점에서 ‘참 잘했어요’ 도장을 들고 누군가 기다려주는 것도 아닌데, 마음은 무작정 달린다. 히말라야를 수차례 등정한 어느 산악인에게 기자가 물었단다. “왜 당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한 등반을 계속하는 건가.”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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